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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주 개인전
대면

2022.11.18-12.18

회화의 선택: 이문주의 ‘Confrontation’

정신영
서울여자대학교 현대미술전공 조교수

구상회화에는 특별한 힘이 있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아마도 유전자 속에 새겨져 있거나 사회화의 과정에서 배양됐을 법한 인간 고유의 표현하고 전달하려는 의지가 마음에 담았던 대상을 남이 알아볼 수 있는 그림으로 재현하도록 부추긴다. 인류가 그림을 그려온 오랜 기간동안 그리고 싶은 대상을 보다 잘 옮겨내기 위한 기술적 성장이 동반되었을 것이고, 그리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는 대상을 특정하는 판단도 예민해졌을 것이다. 몇 시간, 아니면 불과 몇 분만이라도 바라보고 그리고 싶은 만큼의 관심을 갖게 된 대상을 이왕이면 조금 더 잘 그리고 싶고, 때로는 그 그림을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은 순수한 욕망의 연쇄작용이 수천년의 회화사를 이끌어 왔다. 지금 우리가 마주보는 모든 구상회화에는 이런 역사의 누적이 함축되어 있다.  

작가 개인의 삶에서는 그 인생의 과정에서 보고, 그리고, 보여지고자 하는 행위를 반복하는 노력이 그의 작품을 다져간다. 끝이 없는 이 반복 작업을 하면서 증발한 헤아릴 수 없는 시간들은 그의 화면 속에 투명하지만 명확하게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많이 그릴수록 묘사력이 좋아진다거나 하는 기술적 차원도 그렇지만, 그 이상으로 바라보는 대상에 대해 갖는 연민이나, 연민 때문에 생기는 주저, 표현방식을 연마하는 외롭고 고독한 고민들이 그의 손끝의 긴장감과 길들인 붓을 통해 평면위에 상을 맺기 때문이다. 작가의 인생시간과 맞바꾼 이런 회화의 층들이 시류(時流)로부터 자유로운 작품의 견고한 가치를 만들어낸다. 

이문주의 화면에는 이런 층들이 꽤 명료하게 드러나 있다. 


<야외수업>(2022)은 한 무리의 어린 학생들이 답답한 교실을 벗어나 적당한 녹지에서 하루를 놀러 나온 광경을 떠올리게 하는 제목이다. 야외도 맞고 수업도 맞는데 이 작품을 지배하는 것은 학생들이 아니라 비슷비슷한 간편복 차림으로 손을 맞잡고 각자의 댄스 스텝에 신경을 쏟는 노년의 남성들이다. 이들은 동네 공원에서 지역의 고령층 대상 댄스교실에 참여 중이다. 렘브란트 자화상 정도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으면, 노인 남성을 주제로 그린 그림을 마지막으로 언제 봤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로 허를 찌르는 소재다. 회화의 소재가 얼마만큼은 동시대 사회적 관심사를 반영한다면, 이들은 상대적 무관심으로 가려진 대상들이다. 옆에 걸린 <노란 펜스>(2022)나 <점심시간>(2017-2022) 속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처럼 아마도 한 시대를 일궈왔을 은퇴한 남성들에 대한 사회복지가 동네공원에서 서툰 춤으로 자기들끼리 건강을 챙기라는 정도인걸 보면 세상은 그리 녹록하지 않다.  


역시 아직 노년과 거리가 있는 작가의 화면에 모종의 동정, 회한이나 자책감은 없다. 노인들의 춤을 그리는 작가의 필치는 차분하고 익숙하며 애써 덤덤하다. 수십년간 관찰과 묘사를 반복해 온 그 답게 인체는 무리가 없고 현실감이 돈다. 과거 재개발 현장을 그리던 작품들에 엿보이던 장대(壯大)한 볼거리를 제공해주려는 작가의 어깨 힘이 많이 털려 나간 근작들은 이 잔잔한 일상속의 낯선 광경을 마치 하나의 사건처럼, 긴장 속에서 숨죽인 채 읽어내게 한다. 경험의 산물로 물감의 색조와 농도는 정확하여, 빛이 있는 곳은 발색이 돋보이고 나뭇가지로 그늘진 면적은 무채색으로 표정을 바꾼다. 별 고민 없이 걸친 듯한 남성의 하늘 색 셔츠 속에 능숙한 붓자국으로 쌓아 올린 몸통, 팔과의 경계, 어깨의 구조, 세워진 옷깃이 목 아래쪽에 드리우는 짙고 푸른 그림자가 볼만하고, 그와 손을 맞잡은 남성의 검은 색 양복소매를 헐렁하게 채우는 어깨에서 팔꿈치, 손목까지가 춤추는 듯한 한 두 획의 묽은 붓질로 모두 설명된다. 먼 배경 속 눈부신 연두색의 파릇함 사이로 스며오는 하얀 빛줄기나 왼쪽 상단에 실크스크린으로 추가한 나뭇잎사귀와 잡초 몇 포기의 디테일 등은 잠시 주제를 잊고 과하지도 아쉽지도 않게 잘 그려진 회화를 있는 그대로 누릴 수 있게 한다. 


무심함을 가장하고 있지만, 작가 역시 이들을 화면에 세우는 것이 과거 공사현장의 모래산이나 벽돌더미를 그려 올리는 것 보다는 더 감정적인 작업임은 틀림없다. 스텝을 옮기는 발 끝에 집중하는 이들의 차근한 움직임의 동세만큼 애써 침착하게 겹쳐진 붓자국은 감정의 동요를 가라앉히고는 있지만, 생각해보면 이 전시의 제목은 “confrontation”이다. 한국어로는 ‘대치, 대립’이라는데 영문을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보면 영어의 어감이 갖고 있는 ‘피할 수 없는,’ 많은 경우 ‘해결이 어려운 갈등 구조를 안고 있는’ 대면이나 대결이라는 여운을 전달하고자 한 듯 읽힌다. 작가는 어떤 난제와 대면하고자 하는 것일까. 노년이 의미하는 자기희생의 과거, 찾을 곳이 없는 보상과 관심을 주지 않는 사회의 냉담이 시스템화된 시대에 사는 기성세대의 한 명으로서 그가 마주하고 있는 공원 한 구석의 광경은 이들에 대한 연민만큼이나 부담스러운 사건이다.


멀리서만 이들을 바라봤을 뿐 다가가 취재할 기회를 놓쳤다는 작가의 화면은 이들을 객관시 하려는 심리적 거리감으로 가득하다. 동작을 익히는데 열중한 듯한 남성들은 아예 등을 돌리고 있거나 얼굴이 보이더라도 모자나 안경으로 가려져 표정을 읽기는 힘들다. 자꾸만 쿠르베의 <돌 깨는 사람들 The Stone Breakers>(1849)이 떠오르는 것은 단순히 쿠르베가 선택한 두 명의 노동자 역시 화면에 등을 돌리고 있거나 모자를 쓴 채 앞에 놓인 고된 노동에 온 신경을 쏟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며, 쿠르베도 이들에게 그 어떤 종류의 동정이나 감정을 싣지 않으려 하고 있기 때문만도 아니다. 본격적으로 근대사회로의 시동을 걸기 시작하던 1850년, 파리살롱에 천사와 귀부인들의 초상들 사이에 걸렸던 이 작품의 핵심은 쿠르베의 뛰어난 회화적 기교 속에 도사리는 불편한 ‘대면’ – 부르주아 사회와 프롤레타리아의 삶 – 이라는 사회를 향한 선언이었다. 


포스트모던 이후를 사는 작가에게 ‘선언’은 구차한 감성이다. 우리에게 이미 계급은 수저 빛깔로 희화화 되고 선언의 자리는 SNS로 충족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의 유의미한 선택과 담대한 묘사를 통해 그의 작품 속 노인들을 마주하고 있으며, 갈등을 인지하고 이들의 과거와 현재, 우리 자신의 미래를 생각한다. 구상회화의 힘은 이렇게 유효하다. 시공간 속 한 지점을 겨냥하여 특정하는 구상회화의 지시행위는 그려진 대상 뿐 아닌 선택의 주체인 작가, 그리고 무엇보다 구상회화라는 지속적 의미작용에 강력한 힘을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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