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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을 너는 사람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이들은 능숙한 손놀림으로 각자 맡은 바를 성실하게 해낸다. 이들의 손에는 실과 옷감처럼 익숙한 소재뿐 아니라,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덩어리, 액체, 물질이 들려있다. 이들은 수많은 색들이 쌓여있거나 매달려 있는 검은 공간에서 색을 비교하여 고르고, 비교하기도 하며, 그것을 채집하여 담그고, 숙성하고, 우려내거나, 요리를 하듯 반죽하여 빚고, 뜯고, 찢고, 버무리고, 분리하고, 붓고, 말리는 데에 여념이 없다. 이렇게 정성스럽게 준비된 색덩이들은 얇은 실이 되어 타래로 감기거나 고운 색의 천으로 다시 떠지고, 재단되고, 건조, 가공되면서 다음 과정으로의 이행을 기다린다.

 

최수진은 다양한 인간관계 안에서 반응하는 개인의 주관적인 감정, 심리의 문제를 직관적인 색의 사용, 다양한 속도와 움직임으로 표면을 스쳐간 붓의 흔적, 그로 인해 자연스럽게 새겨진 표면의 요철로 이뤄진 몽상적인 풍경과 인물의 초상으로 그려왔다. 그의 다섯 번째 개인전 ‘무지개 숨 제작소’는 대상을 바라보는 작가적 시선과 인식의 문제가 발현되는 지점, 그리고 그것이 회화의 화면 안에 이미지로 옮겨지는 과정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물음에서 출발한다. 그간의 회화가 그림의 대상이 되는 인물 혹은 인물들 간의 관계에 집중했다면, 지금은 그 대상을 회화적으로 표현하고 싶은 찰나, 작가로서 ‘그리기’를 고민하는 순간들을 회화의 표현 방식 안에서 깊숙이 추적해나가고 있다. 

 

꽤 오랜 시간 동안 작가에게 ‘숨’은 그림의 소재이자 제목의 일부였지만, 그보다 더 오랫동안 개인의 체험 안에서는 천식으로 인해 고통스러움과 살아있음을 번갈아 자각하게 만들었던 존재다. 숨이 쉬어지는 강도, 미세한 숨의 무게를 감지하고 조절하면서 간신히 평온의 상태에 도달하기까지엔 적절히 훈련된 인내와 예민한 인식의 과정이 필요한 것처럼, 그에게 숨이란 대상에 대한 심리적 상태를 섬세하면서도 은유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하나의 중요한 조형언어로서 자리하고 있다. 그것은 공기 중에 부유하는 다양한 형태들, 이를테면 구름이나 수증기, 안개, 무지개, 연기 혹은 먼지의 형상으로 화면 속에 등장하는데, 실제로 호흡이 공기의 운동과 흐름을 만들어내듯 그의 그림에서 대상에 대한 주관적 심리를 은유적으로 표출하는 방식 중 하나인 숨은 다양한 색채와 형체, 리드미컬한 붓의 움직임을 만들면서 물감의 표현과 표면의 요철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다. 무엇보다 숨은 작가가 본능적, 혹은 직관적으로 대상을 회화적으로 인식하는 순간을 의미한다. 

 

전시 제목의 ‘무지개’는 공기 중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점에서 숨의 또 다른 시각적 표현방식이기도 하지만, 색을 통해 대상에 대한 개인의 생각과 느낌을 전달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맥락에서 ‘무지개 숨’이란 대상에 대한 찰나의 인식을 다양한 색을 통해 회화적으로 표현하는 과정을 의미하며, ‘제작소’는 그러한 과정이 실제로 일어나는 장소로서 작가의 신체, 대상에 대한 인식이 구체적인 회화적 실천으로 옮겨지는 장소를 은유적으로 지칭한다. 색과 인물들의 다양한 동작을 통해 시각적 은유가 생성되는 곳. 그 안에서 인물들은 부지런히 무언가를 발견하고, 고르고, 선택하고, 만들고, 매만지고, 가다듬기를 반복한다. 여기에 연극의 무대처럼 유독 어둡게 표현된 배경은 색에 대한 인식, 색을 만드는 과정, 보다 정확하게는 적절한 색을 찾아, 형상을 만드는 인물의 동작을 더욱 두드러지게 만들며, 간혹 부분적으로 완성될 회화의 모습을 슬며시 드러내면서 작품 간의 연결고리를 제공하기도 한다. 

 

1층에 전시된 작품들은 작가의 내면에서 대상을 회화적으로 인식하는 과정과 그것을 신체를 통해 화면 위에 옮기는 과정을, 각 인물이 수행하고 있는 행위들의 연쇄와 다양한 안료 혹은 재료로 표현된 색채의 물질적 상태 안에 담아내고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회화를 물리적 행위의 측면에서 보면 머릿속에 떠오른 심상을 표현하기 위해 작가가 선택한 안료를 평면이라는 물질적 표면 위에 옮겨 바르고 덧대어 완성하는 단순한 과정의 결과일지 모르나, 최수진이 그려낸 풍경이 이야기하듯이 그것은 하나의 작품으로서 존재하기까지 고도의 집중력을 요하는 사고의 과정이자 수많은 과정과 시행착오, 선택과 분별, 계획과 실험의 반복을 요한다. 흥미로운 점은 작가의 경우, 그의 회화에서 중요한 조형요소를 차지하는 색 선택의 문제가 색을 ‘만든다’는 개념 아래, 시각적이면서도 매우 촉각적인 행위들의 집합으로 나타나며, 이것은 결국 그의 회화에서 다양한 붓질로 등장하는 이미지와 안료의 양과 질감이 만들어낸 회화적 마티에르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지하층에 전시된 세로 2미터, 가로 3미터 크기의 대작 <어떤 산책>(2017)으로 귀결되었다가, 또 다시 그것의 단초가 되는 과정들을 담은 작품들로 시선을 이끌면서 회화의 의미와 표현의 문제를 끝없이 순환하며 상기시킨다. 

 

<파랑 채집>(2017)부터 <초록을 너는 사람>(2017)에 이르기까지 서로 다른 크기의 프레임 안에 표현된 이미지들은 각기 다른 동작과 색을 선택하는 본능적인 감각, 그리고 그것이 하나의 회화적 표현으로 발현되는 순간들을 간접적으로 전한다. 몸과 마음 곳곳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들의 총체를 은유적으로 담아낸 회화. 어쩌면 이것은 형과 색을 이용하여 대상에 대한 감각적 표현의 과정을 경험하는 화가 자신, 그리기의 지난한 과정 중에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들, 그의 몸을 통해 이미지가 생성되는 과정을 솔직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담아낸 일종의 내면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무지개 숨 제작소’라고 명명된 이 은밀한 공간에는 분주함 속에 여유로움이 있고, 실수 없이 착수되어야만 할 것 같은 일들의 연쇄 사이사이를 빈틈없이 꽉 채운 긴장감 속에서도 즐거움이 가득하다. 개인사 안에서 벌어진 구체적인 사건들에 대한 경험과 기억, 그리고 그에 밀착되어 있던 감정의 상태를 인물이 있는 풍경 속에 담아내던 지난 작업들에서 한 걸음 나아가, 최수진은 회화에 관한 보다 근본적인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지면서, 화가로서 세계를 회화적 표현의 대상으로 인식하는 기본적인 태도와 생각, 그리고 그것을 적절하게 표현해 낼 구체적인 감각의 문제를 적극적인 그리기의 행위 안에서 풀어내고 있다. 적어도 지금의 그는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도 저마다의 빛을 발하는 색을 따라 당황하거나 조급해하지 않고 흔들림 없이 맡은 일을 능숙하게 해내는 제작소의 사람들처럼, 어쩌면 고백하듯 그려낸 자신의 분신이자 내면의 자화상을 다짐삼아, 부지런히 자신만의 색과 속도로 ‘그리기’를 지속하며 회화에 대한 생각의 깊이를 만들고, 그 과정에서 발견한 소소한 즐거움을 한껏 만끽하고 있는 듯하다. 

_황정인(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다방 큐레이터)

디자인 : standardtype

사진 : 스튜디오 수직수평

후원 : 서울문화재단

도움을 주신 분들 : 정규형​

최수진 개인전

무지​개 숨 제작소

2017.11.3 -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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