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숨소리
<그림자 숨소리> - 안혜상 개인전
「미약한 숨으로 태워낸 그림」
서다솜 (독립 기획자)
이 세계에는 어슴푸레한 어둠이 내려와 있지만, 어둠에 동화되지 않은 빛이 스며들어 있다. 이 세계의 존재에는 빛에 따라 드리워진 그림자가 아니라 자체에서 새어 나오는 어둠이 따라 붙는다. 이 세계는 소리 죽인 밤처럼 고요하면서도 그곳의 존재들은 저마다의 색을 충실히 밝힌다. 푸르고 생생한 이 세계는 우리가 감지하며 살아내는 시간의 굴레에 속하지 않는다. 낮도 밤도 오지 않는 이곳에서 시간은 사방으로 흐른다. 이곳은 〈검은 지대〉다.
안혜상의 〈검은 지대〉는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운하」라는 소설 속, ‘그녀’와 퓨마가 만나는 장면을 모티프로 그려졌다. 소설의 배경은 현란한 색을 지녔었지만, 큰 화재로 모든 색을 잃고 풍화로 투명해진 재만이 낮게 가라앉게 된 ‘검은 대지’다. 그림으로 구현된 ‘검은 대지’는 낮은 능선이 저 멀리까지 펼쳐져 있고 그 위로는 깊은 어둠이 가득하다. 이 어둠은 먹구름이나 빛이 사라진 시간을 암시하기보다는 본래의 색을 상실한 듯 두텁게 풍경을 압도한다. 세상이 반쯤 무너진 것처럼 황량한 이 대지 위에 하얀 몸과 그 뒤로 서서히 다가가는 한 마리의 맹수가 있다.
그림에는 소설 속 ‘그녀’와 퓨마의 대화, 이들을 둘러싼 구체적인 세계관도 지워져 있다. 대신 작가의 상상을 더해 구현된 비현실적인 풍경, 사라지려는 듯 불안정하게 보이는 어떤 몸과 맹수, 그리고 그 둘 사이의 미묘한 거리감에서 활자로는 재현되지 않은 긴장감이 채워진다. 작가는 의도적으로 작품의 제목을 모티프가 된 ‘검은 대지大地’가 아닌 ‘검은 지대地帶’로 변주하여, 이곳이 소설과 유사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다른 ‘장소’가 되었음을 암시한다. 작가는 어떤 출발점을 되돌아가야 할 목적지로 삼지 않는다.
〈검은 지대〉 뿐 아니라, 안혜상의 그림은 다양한 모티프에서 출발하지만, 대체로 그 경로가 명확하지 않다. 그림 속 세계를 이루는 것들은 작가가 직접 겪은 사건이거나 이제는 희미해진 뭉툭한 기억일 수도 있고, 아주 오래된 신화에서 유래한 상징일 수도 있으며, 혹은 벽에 그려진 낙서일 수도 있다. 그리고 작가는 모티프가 된 서사와 이미지가 한 몸처럼 붙어서 만들어 내는 명료함보다는, 서로가 겉돌거나 빗겨 가거나 미끄러지며 만들어내는 불안정함을 회화의 질료로 삼는다. 저마다의 맥락에서 떨어져 나온 요소들이 서로 충돌하거나 때로는 포개지며 새로운 풍경을 그려낸다. 그래서 이 풍경은 결코 쉽게 읽히지 않는다.
화면 곳곳에는 흘러내리거나 지워졌거나 흩뿌려지거나 다시 그려진 흔적들이 산재하고 그 틈새로 주의 깊게 살피지 않으면 놓쳐버릴 언어들이 숨겨져 있다. 최근에는 작업에 스프레이를 사용하기도 하는데 이는 발산하고 뿜어내려는 동기가 아닌, 분사되어 화면에 안착한 이미지 자체를 매체로 삼기 위한 시도다. 그래서 화면을 곰곰이 들여다보면, 풍부한 질감과 수수께끼 같은 요소들이 하나의 덩어리처럼 강렬하게 밀려든다. 그렇게 안혜상이 그린 풍경은 어떤 사건이기보다는 그 자체로 ‘미스터리’가 된다. 이 ‘미스터리’를 해소하기 위해서 어떤 단서를 쫓아야 할 지, 혹은 어떤 질서를 찾아내야 하는지 쉬이 알 수 없다.
그리고 그곳에는 누군가가 있다. 그곳을 떠나지 못한 채 남은 부동의 몸. 이들은 ‘미스터리’ 속에 적극적으로 빠져들거나 그로부터 탈주하려는 의지보다는 그저 가만히 멈추어 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단한 듯 투명하다. 그곳에 오랜 시간 머물렀던 기억으로 만들어낸 것처럼 하얗게 새어버렸거나 버거운 속을 일부러 게운 듯 속이 텅 비어있다. 풍경을 등지고 서 있지만 풍경을 앞서가지 못한다. 그들을 둘러싼 묵직한 잔해들 사이에서 누군가 잊어버린 흔적처럼 희미하게 서 있다. 그럼에도 쉽사리 풍경 사이로 파묻히지는 못한 채, 버겁게 그 세계를 견딘다.
몇 점의 목탄화 속 ‘조각’들 역시 그런 존재들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속한 세계를 묵묵히 지키는 듯 보인다. 그러나 커다란 몸통에서는 무언가가 자꾸만 비집고 나오려 하거나 뒤엉키며 형태를 일그러뜨린다. 어떤 몸 위로는 수 없이 많은 손이나 얼굴이 켜켜이 쌓인다. 어떤 때에는 잔뜩 뒤엉켜 요소를 찾을 수 없는 모양이 되기도 한다. 이 조각들은 작가가 품어온 어떤 상상이나 기억에서부터 파편처럼 남은 인상을 응축시켜 만들어낸 몸이다. 물질에 새겨지지 못한 채, 물질로부터 끝없이 돌출하는 조각이다. 뒤엉켜 석화된 몸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듯 미세하게 움직임을 달리한다.
그러나 그 조각이 자리한 세계는, 이 불안정함을 바람 한 점 내비치지 않는 침묵으로 깊게 껴안는다. 세계라는 무게를 비집고 나오려는 충동이 미세하게 몸을 일으킨다. 이들의 몸짓은 아주 미묘하게 온 방향으로 향한다. 이는 곧 어느 방향으로 탈주해야 할 지조차 모르는 머뭇거림이다. 단단히 묶인 발을 떼지 못하고 그저 수천 개의 얼굴이 되어, 마주치는 모든 시선으로부터 자신을 내던진다. 조각의 발 아래로 흔들리는 물결이 이 세계의 불안정함을 감지한다. 미약한 숨소리 끝에 잔물결이 퍼진다.
안혜상의 그림 속 존재들은 버겁게 자신을 지탱한다. 그리고 머뭇거리며, 미세하게 살아 숨쉰다. 겨우 견디고 버텨내는 것만으로도 존재를 증명한다. 이 존재들이 어디서 왔는지 혹은 누구인지 알기 어렵고 알 수도 없다. 이들은 작가 스스로 자신의 풍경 속으로 뛰어 들어간 흔적일 지도 모르고, 혹은 우연히 지나치던 누군가가 자신의 몸을 포개어 볼 수 있는 자리일 지도 모른다. 이곳의 존재는 언제나 희미하다. 구체성이 없는 이 텅 빈 틈에는 어떤 몸, 어떤 기억, 어떤 경험, 어떤 상상이든 누울 수 있다.
그렇기에, 그의 그림은 완성되었음에도 계속해서 그려진다. 그림으로 시선을 던지고, 온 몸으로 풍경을 만나며, 뒤엉켜 있는 희미한 기억의 근원을 쫓으며, 오래된 꿈을 다시 꾸며, 투명한 몸에 다른 상상을 덧칠하며, 그림에서부터 벌어지는 모든 상호작용으로, 그림은 계속해서 그려진다. 비록 그 과정은 지난할 수 있다. 그의 그림을 따라 시선을 옮기다 보면 명확하게 해독할 수 없는 짙은 그림자가 어디에서나 우리에게 따라붙는다. 이 그림자는 그림을 선명하게 만들지는 않지만 더욱 신중히 들여다 볼 깊이를 만들어낸다.
안혜상의 회화는 수 많은 리서치와 상상으로 쌓아 올린 다채로운 이미지와 상징의 아카이브라기보다는,오랜 시간 안에서부터 상상을 태워내고,지우고,그렇게 남은 재를 들여다보는 과정에 가깝다.그래서 그의 그림은 단단하고 무겁다.그러나 나무를 태워 낸 목탄이 그렇듯 단단하면서도 무르고 깊으면서도 쉽게 부서져 사라질 수 있다.붙잡아 내기 위해서 자꾸만 들여다보며 대화를 이어가야 한다.다만,안혜상의 그림에서 시작되는 대화는 능숙한 제안이나 자연스러움 친숙함이 아닌 낯선 침묵과 숨과 숨 사이의 공백에서 아득하게 들려온다.그래서 어느 방향으로 지금의 대화를 거슬러 올라가볼 지,어딘가 어긋나는 듯한 지금의 대화가 맞는 향방으로 흘러가는 건지,무엇도 확신할 수는 없다.그저 마주한 시선에서부터 대화는,회화는 다시금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