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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 졸업후 이 친구를 만난건 재수할때 한번 그 이후로는 2014년, 그러니까 작년. 17년만에 한번 그리고 올해 2월이다. 글쎄 이 사람은 무슨 친구를 낡은 종이박스속 물건처럼 떠올랐을때 무자비하게 꺼내쓰려는 경향이 있다. 염치가 없다.

 

작년에도 시나리오 쓰는 것 때문에 학창시절 일들을 쥐어짜게 하더니, 이번에는 뭔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자기 이야기를 좀 들어달라나…

친구의 그림은 얼핏 보기엔 남자들이 놀고있는 장면이었다. 거기다 이번 작업의 주제는 다재무능 이라고 한다.

다재무능이라.... 그건 네 이야기냐고 물으니 그럭저럭 그렇다고 한다. 그는 예전에 어머니랑 전화통화를 할때마다 같은 잔소리를 듣고 마음속 깊이 수도 없이 "어머니 저 정말 할수있는게 없어요 어떡합니까!" 라고 말하고 싶었다고 한다.

친구는 재능이 많은 사람이다. 사실 학창시절부터 공부와 운동빼곤 거의 모든걸 잘 습득하고 많은 지식을 흡수해버리는 사람 이었다.

말 그대로 다재다능한 편인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이런 그림을 들고와서 이야기를 나누자고 한다.

아마도 '다재'는 자신의 의지와 관련된 영역이고 놀거나 아무것도 안하는 남자들의 '무능'은 자신의 의지 바깥의 이야기 겠지. 그러고 보면 이렇게 일상적으로 흘러가는 그림도 단순하지가 않다. 결국 이렇게 다재와 무능 사이의 사람들이 버티는 것으로 연결되어 있는 세상이니까.

나는 친구에게 나도 다재와 무능 사이 어딘가에서 버티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이 친구의 웃긴 점은 겁많은 사람인데 어딘가 안정적인 곳에 위치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고교때 나를 따라 미술부를 들어올때도 거기가 거의 폭력서클에 거의 매일 매맞고 기합 받는 데란걸 알면서 따라왔다.

결국 재수는 했지만 똥 같은 학교에서 동기중엔 혼자 서울로 가버렸다. 지금 생각하면 이 친구는 버티기에 꽤 능숙한 사람이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인가? 그림에 나오는 남자들을 보면 마치 1차 대전 프랑스 참호속 군인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다 죽었지만 그래도 이겼잖아… 그렇게 말했더니 이 친구는 2차 대전때 마지노선 봐라. 별로 안죽었지만 졌잖아. 버티기는 변화에 약하다. 아마도 이런시기에 예술하다 다음세대에 모두 파묻히는거 아니냐? 라고 한다.

그래서, 이 친구야. 우리 일생중에 더 나은 내일은 오지 않을거 같아. 라고 말하니. 동문서답 같지만 우문현답 같은 말을 한다.

그래도 오늘보다 내일 조금이라도 나아진 나를 보며 사는거 아닌가? 그게 버티기지. 그래서 이번엔 그림도 그려봤어 허허.

마지막으로 왜 또 날 불러내서 귀찮게 한거냐? 라고 물으니 이리 말한다.

자기가 직접 쓰는건 별로라고 한다.

아니 그럼 이거 내가 무슨 글 쓰는 거냐? 라고 물으니. 짧게 '응' 이라고 한다.

하… 이녀석… 버티기란 이런거였군.

염치가 없다.

 

_양정목

동형에게

 

마음이랄 게 있을지 모르지만, 남자놈들 마음이 돌밭이자나. 옥토를 갖고 태어나면 뭐하냐. 선배랍시고 떼거지로 휩쓸고 나면 옥은 간 데 없고 욕바가지만 나뒹굴지. 우린 그렇게 어찌 어찌 살아왔을 거야.

 

바위 틈에 핀 꽃, 예쁘자나. 근데 정작 바위는 그 꽃이 예쁜지 모르거든. 그게 꽃인지도 몰라. 멍청해서 모르는 게 아니라, 자신이 돌임을 몰라서 모르는 거야. 자신이 돌임을 알 때, 꽃이 꽃임을 알 때, 저 밑바닥 옥토를 향하는 꽃의 소리가 들릴 때, 바위엔 금이 가기 시작하겠지. 한 송이 꽃으로 바위가 깨질까? 만일 바위가 깨지는 것이 비극이라면 그건 꽃 때문이 아닐 거야. 꽃이 겨우 벌려 놓은 작은 틈새를 온갖 것들이 가로채기 때문일 거야. 자책과 우울 등 등.. 아마도 우린 그렇게 금이 가고 있는 바위덩어리인지 몰라.

 

돌이 아님에도 돌로 살아가는, 그러면서 돌인 줄도 모르고 사는 우리는 허깨비지 머. 그런 가상들이 모여 사회라는 가상을 굴리고, 사회는 그런 가상들을 다시 굴리고. 둥글게 때론 모질게.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실재라고 믿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믿지. 실재라고 믿어야만 눈 가린 말처럼 달릴 수 있자나. 거부할 수 없는 욕망으로 말달리자나. 이런 세상에서 예술은 뭘까? 예술 또한 가상에 불과한데 말야. 가상에 맞서기 위한 가상? 가상을 가로지르기 위한 가상? 가상에 뿌리내린 우리가 이성과 의지만으로 가상의 숲을 헤쳐 나갈 수 있을까? 우리는 그동안 많이 보아왔자나. 가상에 저항하다 마침내 가상에 포섭되어 녹슬어 버린 이성과 의지들 말야. 조롱과 힐난을 감수하면서 예술은 가상의 강을 건너갈 수 있을까?

 

욕망이건 예술이건 대상이 필요하지. 자신을 촉발시켜 줄 매개체 말야. 욕망은 대상을 만나기 위해 가상이 심어놓은 메트릭스와 접속해야만 하지. 예술? 성공과 권위를 노래하는 예술은 없자나. 그렇다면 예술을 촉발시키는 대상은 가상이 아닌 것? 가상이 아닌 것을 실재라 부른다면, 예술은 실재와의 접속? 예술적 재능은 실재와 접속하는 능력? 이건 감수성인가? 좋아, 그럼 인풋 + 아웃풋 = 예술적 재능. 자, 이제 가상을 건너기 위해 필요한 물품들을 적어보자. 가상의 모순과 유혹을 비판하고 헤쳐나갈 이성과 의지, 그리고 녹을 닦아낼 연마석, 예술적 재능.

 

근데 말야. 대체 가상과 실재가 뭐길레.. 허위와 진실? 상대와 절대? 변하는 것과 영원한 것? 진실 두려워. 절대 고독해. 영원 어지러워. 이 모든 걸 뚫고 실재에 이르려는 사람들이 있지. 내가 아는 그 또한 진실과 절대와 영원을 동경해. 하지만 그는 때로 허위와 상대와 변심 앞에서 낙담하지 않고 위로를 건내려 하지. 그 또한 누군가의 실망 앞에 서야 하는 현실이 자신을 비켜가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야. 그는 어찌 보면 가상과 실재가 부딪칠 때 튕겨 나오는 빛과 향기와 소리에 매혹된 사람일지도 몰라. 그는 *‘바람 부는 처음을 알고파’하지만 고단한 현실을 부둥켜 안은 가난한 마음 때문에 실재와 가상의 경계에서 두리번거리는 사람일지도 몰라. 그래서 그는 정작 꽃이 필 때면 부끄러움과 자책으로 그 자리를 메워버리고 마는 그런 사람일지도 몰라.

 

가상이건, 현실이건, 사회건 그러한 세상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 중에 그가 있을 거야. 그리고 많은 그들 중에 누군가는 예술가일 거야. 그는 얼굴도 모르는 주인이 시키는 예술에 혹사당하면서도 즐겁게 웃는 노예일 거야. 주어진 능력이 아니라 주어진 사역. 그 놈의 재능 탓에 말야.

 

꽃을 받치고 있는 바위에게나 **‘운동화’를 벗은 남자에게나 잔혹한 시간이다. 견디자.

 

선배랍시.고

_고승욱(미술작가) 

 

 

 

 

*‘바람 부는 처음을 알고파’

김민기 <두리번 거린다> 가사 중

 

**‘운동화’

강동형 만화 <shoes>에 나오는 선물 받은 운동화

 

 

강동형 개인전

다재, 무능 Cultivated Mind

2015.4.24 -

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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