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는, 시간 Draw and don't waste time
참여작가 : 김덕훈, 민정기, 오윤, 이승주, 이해민선,
임직순, 정정엽, 진지현, 홍도연, 헨릭야콥
2020.3.27 -
4.25
2020년 합정지구 기획전 《그리는, 시간 Draw and don’t waste time》은 매체가 주는 본연의 감각에 주목하고 ‘그리기’를 통해 확장되어가는 세계를 탐색하려는 전시다. 이번 전시에서 소개하는 작품은 대체로 연필, 먹, 잉크 등으로 그려졌거나 판화로 찍어낸 것들이다. 장르적 범주로 전시를 말하자면‘드로잉, 그리고 몇 점의 판화’라고 정의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전시가 선보이려는 세계가 장르의 속성 안에서만 이해되어버릴 우려를 피하고자 매체, 미술사, 장르, 개념이라는 맥락에서 과감하고도 조심스럽게 벗어나보려 한다. 장르적 범주를 탈피하여 종이 위에 새겨진 흔적과 그로부터 파생되는 세계를 탐험하기 위해, ‘그리기’라는 순진한 말에서부터 전시는 출발한다.
굳이 그리지 않아도 수많은 창작을 해낼 수 있는 시대에서 ‘그리기’에서 출발하는 건 너무나 머나먼 길로 돌아가거나 시대착오적인 발상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리기’가 아주 사소하고 근본적으로 시각예술을 지탱하는 행위라는 점에서, 그렇기에 언제나 유효하면서도 어느 세대에서나 공유할 수 있는 감각이라는 점을 주목한다. 캔버스 위에 손으로 그리는 그림보다 디지털 이미지가 범람하는 시대에 그 유효성은, 예술가의 ‘붓질'로 상징되는, 작가의 독창성과 원본성을 담지하는 손의 흔적이라는 질료적 차원이 아니라, ‘draw’라는 단어의 일반적 어원처럼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어떤 것을 내 앞에 끄집어 내고자 하는 행위라는 측면에서 그러하다. 그린다는 행위는 어렴풋한 그 무엇에 구체적인 형상을 부여하고, 추구하는 감각을 오롯히 실현하려는, 그래서 어떤 작가에게도 결코 끝나지 않는 순전한 과정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전시는 미술사적 궤도를 따르거나 장르를 둘러싼 담론을 형성하려는 담대한 목적의식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목적과 시간대에 수행된 ‘그리기’를 그저 늘어놓고 다시 바라보려고 한다.
전시는 미술사적 연대나 장르를 구분하지 않고 10인의 작가들을 선정하였다. 이들의 작품으로는 주로 회화 작업으로 알려진 중진 작가들의 또 다른 서정성을 보여주는 연필 소묘나 흑백 판화도 있으며, 부지런히 미술운동에 동참하고 넓은 매체를 소화해온 작가의 소박한 시선이 묻어나는 드로잉 수십 점도 있다. ‘그리기’로부터 예술가로서의 시작을 도모하고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내려는 신진작가들의 작품도 다수 소개된다. 전시에 소개된 작품들은 저마다 다른 이유와 목적으로 그려졌지만 ‘그리기’를 통해 점차 단단해지려는 여러 시도로서 한 데 모였다. 명료한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 떠오르는 심상을 포착하기 위한 스케치로서, 세계관을 구축하기 위한 수단으로, 때로는 스스로를 지탱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때로는 개념 그 자체로서 완결되기 위한 선으로서, 종이 위에는 무수한 시간과 흔적이 새겨진다. 전시는 그렇게 그려지고 새겨진 개별적인 세계를 느슨하게 연결한다. 선과 선의 조우 사이에서 선명하게 떠오르는 형상을 새로이 발견할 기대를 안고서, 혹여 놓쳐버린 시간을 아쉬워하지 않도록 부지런히 선을 좇는 여정을 제안한다.
김덕훈
커먼센터에서 열린 《오늘의 살롱》(2014)을 통해 데뷔하였고, 커먼센터와 에이라운지 등에서 개인전을 개최하였다. 작가는 세계를 끊임없이 변화하고 생성되는 ‘사건’으로 여기고, 그리기를 통해 덩어리처럼 얽힌 ‘사건’의 흐름을 포착하고자 한다. 그가 그리는 풍경과 인물은 주로 오래된 영화의 장면에서 참고하지만, 재현된 풍경은 마치 흑연이 쌓이며 만들어진, 다시 말하자면 결코 존재할 수 없는 세계처럼 투명하고 고요하다. 이러한 세계는 시간의 흐름에 휩쓸려 우리가 알아채지 못했지만 언제나 시간 속에 존재하는 찰나를 붙잡으려는 시도이다.
민정기
1980년대 리얼리즘 미술운동에 동참하며, 일상적인 소재를 통해 후기 산업사회로 돌입하는 한국 사회에 대한 비판과 우려의 시선을 담은 작품을 다수 선보였다. 최근에는 실재 풍경을 기반으로 과거와 현재, 현실과 가상을 가로지르는 새로운 도시산수를 그린다. 이번 전시에서는 작가의 초기 대표작 〈세수〉의 판화 버전을 소개한다. 세수하는 인간의 모습으로 1970년대의 모습을 담담하게 그려냈던 〈세수〉는 모노톤의 에칭으로 옮겨지며 유화와는 또 다른 형상의 세밀함과 담백한 현장감을 드러난다.
오윤
1979년 ‘현실과 발언’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사회비판적 리얼리즘과 더불어 민속 문화에 대한 관심을 접목한 조각과 판화 작품을 선보였다. 1980년대 이후부터는 목판화에 전념하여 민중 판화의 발판을 마련하였으며, 인간의 역동적인 움직임을 복잡하지 않고 단순 명쾌하게 표현함으로써 민중판화를'민족미술 또는 민족문화라는 넓은 영역으로 이끌어 간 예술가'라는 평가를 받았다. 1983년 《시대정신전》에 출품된 〈사상체질도〉는 기득권층을 희화화하여 그려낸 판화로 오윤 특유의 단순하고도 명쾌한 표현 방식과 풍자적 태도가 드러난다. 1986년에 작고하였다.
이승주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조형예술학를 졸업하고, 개인전《걱정 없는 나날》(갤러리 밈,2019)과 다수의 기획전에 참여하였다. 이승주는 주로 일상에서 경험한 부조리함이나 비이성적인 사건으로부터 시작된 불길한 상상을 다양한 드로잉의 방식으로 그려나간다. 이번 전시 참여작인 〈천변만화〉는 정해진바 없이 천만 가지로 변해가는 모습을 뜻한다. 종 잡을 수 없이 변화하는 현실에 대응하는 정서적 반응들이 각기 다른 이미지로 기록되고, 이들은 서로 충돌하고 뒤섞이며 균형이 어긋난 세계를 재현한다. 작가에게 ‘그리기’는 그러한 세계를 살아가며 남기는 수기이자, 바로보기 위한 실마리이며, 살아남고자 하는 몸부림이다.
이해민선
2004년 건축도면을 이용하여 도시생태에 대한 드로잉과 비디오 작업을 시작으로 개인전 《살갗의 무게》(합정지구, 2015), 《젊은 모색》(국립현대미술관, 2006), 《B컷드로잉》(금호미술관,2017)등 다수의 기획전에 참여 하였다. 그의 작업은 풍경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한다. 작가는 풍경 속 대상을 주목하고 그 속성을 관찰하면서 대상이 내포한 물질적인 경계, 사회적 함의 등 다양한 요소를 읽어내고, 응시로부터 시작된 연쇄적인 과정에 대한 은유로서 풍경 속 대상을 ‘화폭’이라는 또 다른 풍경으로 옮겨낸다. 전시 참여작인 〈금이빨을 잃어버린 자가 찾아온 곳〉 (2018)은 작가의 직관적인 상상으로 그려낸 풍경으로 ‘두 다리로 거친 땅을 버티고 서 있는’ 인물과 그들의 팔에 위태롭게 올려진 과일들은 어떤 상황도 설명하지 않고, 열린 상태 자체로 존재한다.
임직순
1940년 조선미술전람회 입선으로 화단에 데뷔하였으며, 해방 이후 1957년 국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뒤 국전 추천, 초대작가 및 심사위원직을 역임했다. 밝고 정감 있는 색채와 짜임새 있는 구성으로 생활 주변을 담담히 그려내었고 특히 꽃과 여인 시리즈로 알려져 있다. 1984년 작 〈소녀〉는 세밀한 터치가 잔잔한 음영을 이루어 차분히 눈을 감은 소녀의 표정을 깊고 청아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1996년에 작고하였다.
정정엽
정정엽은 20대부터 ‘두렁’, ‘갯꽃’과 같은 소그룹 미술운동부터 ‘여성미술연구회’ 활동까지 한국 여성주의 미술운동에 매진해왔다. 1995년부터 열여덟 차례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수많은 국내외 단체전에 참여해오는 가운데 2018년 제4회 고암미술상을 수상하였다. 여성의 삶과 정치, 그리고 미술의 경계 넘기와 확장을 꾀하면서 40여년 동안 활발한 창작활동을 펼치고 있다. 이번 전시에는 대중에게 발표하지 않았던, 작가가 2001년부터 국내와 해외여행을 통해 꾸준히 제작해 온 다수의 드로잉북 중 일부를 소개한다.
진지현
세종대 회화과와 동대학원 석사를 졸업하였다. 2017년부터 여러 차례의 단체전에 참여하였으며 2019년 개인전 《예쁜 강아지가 있었다면》(삼육빌딩)을 개최하였다. 작가는 ‘탄생과 동시에 죽음을 맞이한 인간의 서글프고 아름다운 초조함을 표현하려 했고, 종이 위에서 짓이겨 누르고 긁으며 머물다 그림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의 먹을 이용한 드로잉들은 특유의 초현실적인 서사와 함께 먹과 종이라는 한정된 조건으로부터 새롭고 풍부한 표현의 즐거움을 보여주는 동시에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들의 한정된 ‘생’에 대한 연민을 느끼게 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볼대고누워 Skin -to –die’시리즈 중 아홉 점의 최근작을 선보인다. 상상의 무대이기도 한 숲을 배경으로 새, 고양이, 꽃 등 멜랑콜리하면서도 사랑스러운 소재들이 엇갈린 사랑과 삶과 죽음에 대한 작가의 다중적인 입장을 드러낸다.
Herik Jacob
브레멘 예술대학을 졸업하고 베를린을 거점으로 작품활동과 함께 독립예술공간 ‘쿨투어 팔라스트 베딩 인터내셔널Kultur Palast Wedding International을 운영하고 있다. 그는 드로잉에서부터 점토, 설치, 퍼포먼스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일상에 개입하는 방식을 실험해왔다. 이번 전시에서는 작가의 집, 가정, 일상을 구성하는 사물들을 알파벳 순으로 분류하여 그려낸 〈가정 A-Z (household A-Z)〉시리즈 중 두 점, 〈국수 채망(noodle sieve)〉 와 〈망치(hammer)〉을 선보인다. 본래의 쓰임과 맥락에서 떨어져 나온 사물들은 우리의 일상을 이루는 소박하고 사소한 욕구의 매개체로 재현된다. 2016년 합정지구에서 개인전 《사랑하는 이웃들에게》를 열었다.
홍도연
국민대학교 미술학부와 동대학원을 졸업하였다. 작가는 그림을 그리는 순간의 태도를 드러내는 드로잉의 성격에 주목한다. 그는 건물, 도로, 횡단보도 등 여러 선Line 위에 발을 딛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 연필 연작을 통해 드로잉의 속성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보행섬〉,〈신호대기〉,〈임시보호소〉등의 연작을 보면 빛과 그림자로 이루어진 도시풍경과 고독하고 무기력해 보이는 소시민들의 형상들이 깊은 흑연의 질감과 함께 서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최근에는 신진 작가로서의 여러 고민들을 담은 드로잉들을 애니메이션 〈예술가로 사는 방법〉을 제작했다. 최근에는 신진 작가로서의 고민들을 담은 드로잉 애니메이션 〈예술가로 사는 방법〉을 제작했다. 종이에 구멍이 날 때까지 연필로 그리고 지우기를 반복하는 행위의 흔적은 ‘작가로서의 삶’에 따라오는 질문들에 대해 스스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디자인 : 권지운
전시촬영 : 홍철기
도움주신 분들: 김동화, 주황, 박은정
후원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시각예술 창작산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