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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의 안개는 이내걷혔다 

기획 : 전그륜

참여작가 : 김경후, 박영선, 여다함, 이제

2021.2.6 -

2.28

  페미니즘이 다시 등장하던 시기, 곳곳에 생기가 돌았다. 그동안 감춰져 있던 문제가 드러났고 많은 이들이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움직였다. 하지만 오랜 시간 묵어온 만큼 변화는 더디었고 시작이 가져다주는 활기는 금세 사라졌다. 마음은 점점 조급해지고 때로는 반복되는 실패에 절망하기도 했다. 선명하기만 할 것 같던 이곳에, 안개가 부옇게 흐렸다. 이대로 흘러가도 좋을까. 우리가 원하는 종착지에 갈 수 있을까. 그곳으로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곳의 안개는 이내 걷혔다》는 안개를 서둘러 걷어내자고 재촉하거나 종착지로 가는 지름길을 일러주지 않는다. 그보다는 앞서 말한 것과 반대쪽으로 향하려 한다. 먼저 소란스러운 곳을 벗어나 정적을 찾는다. 빠르게 몸을 움직이기보다는 멈춰 서서 숨을 고르고 천천히 움직이려 한다. 목적지를 향해 무작정 내달리지도 않는다. 그 대신 한걸음 물러서서, 지금 우리가 어디에 서 있고 또 어디로 가려는지 차분히 더듬어보려 한다. 

  네 명의 참여작가는 페미니즘과 거리가 멀어 보인다. 김경후, 박영선, 여다함은 여성주의를 주제로 시를 쓰거나 작업을 하지 않는다. 이제는 여성의 몸과 초상을 그리지만 그의 작업에서 뚜렷하게 페미니즘을 읽어내기 어렵다. 이 전시는 이들의 작품을 페미니즘 시각으로 해석하는 대신, 그들이 말하는 방식과 태도를 보려 한다. 

  김경후의 「야광별」에서는 내내 긴 어둠이 읽힌다. 시인은 "어둠만 기다랗게 뻗어나가는 방에서 "130억 광년 떨어진 별"에 있는 누군가를 떠올리고, 그도 빛을 "영원히 기다리고 있을까" 궁금해한다. 아주 오래전 지구로 떨어져 이미 “어느 어둠"이 된 "빙하기 별똥별도 떠올린다. 빛이 언제나 생길까. 빛을 찾고 싶던 그는 방에 야광별을 붙이지만, 이곳은 플라스틱 조각조차 밝힐 수 없다. 

여기에는 "깜깜한 어둠만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의 시가 더 아픈 이유는 다른 데에 있다. 그가 “두 눈을 부릅뜨고 있다는 사실. 그것이 가장 슬프다. 무언가에 집착할수록 그것에 함몰되기 쉽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면 그것을 찾는 이유조차 흐릿해지기도 한다. 그가 "벌겋게" 밤을 지새울수록, 그가 빛을 찾아 헤매는 밤"이 많아질수록 그의 눈조차 빛을 잃을 것이다. 그의 눈은 곧 멀지도 모른다. 

  이제의 그림과 여다함의 영상은 어떨까. 이제의 출품작은 이곳과는 한참이나 먼 데에 있는 세계 같다. <터널>에는 차도 사람도 없다. 터널 조명은 곧게 뻗어 출구를 가리키지만 바깥에서 새어 들어오는 빛은 아직 멀다. 〈공항〉, 빈 활주로에 곧게 서 있는 사람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같다. 시인처럼 간절하게 무언가를 찾는 것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자리에서 한 발짝도 떼지 못한다. 그와 달리 여다함의 <매우 만족 만족 보통 불만족 매우불만족>에 등장하는 풍선은 내내 버둥댄다. 얼음에 묶인 풍선은 그 가벼운 무게조차 버거워 날아가지 못한다. 그럼에도 풍선은 계속 오르려 한다. 몸을 들썩이다 얼음을 번쩍 들어 올리기도 하고 바람을 타고 이리저리 끌고 다니기도 한다. 

  세 작품은 간절하게 어떤 순간이 오기를 기다린다. 하지만 어둠은 여전히 짙고 이곳은 너무 고요하다. 박영선의 <인왕산과 인왕산과>는 이런 적막에 균열을 낸다. 작가는 3년간 그가 살던 집 창 너머로 보이는 인왕산을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매일 또는 며칠 걸러서, 그러다 하루에 몇 번이고 찍었다. 그의 산은 넘실대며 모습을 바꾼다. 어느 날은 구름이 많고 또 어느 날은 적다. 하늘이 높고 청명해 오랫동안 온몸을 드러내다가도 금세 안개를 품고 숨어버리기도 한다. 공기, 온도, 습도, 바람의 움직임은 날씨라는 단어로 쉽게 뭉뚱그려져서 이것을 읽어내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 주위를 살펴야 한다. 수많은 산을 보고 기억하고 또 예민하게 그 변화를 알아채야 한다. 그러므로 그의 사진은 단순히 산을 담아내거나 본다는 것에서 머물지 않는다. 긴장하며 지켜보는 것, 변화를 감지하는 것, 내 몸의 모든 감각을 깨워내는 것에 가깝다. 

  이때 여다함의 실은 그 균열을 뚫고 나와 꾸물거리기 시작한다(<무제>). 어떤 실은 볼록 튀어나와 구불거리며 기어가고 또 어떤 것은 몸을 길게 빼어 크고 천천히 둔한 몸을 늘어뜨린다. 그러다 면이 되어 아래로 느닷없이 얼굴을 내밀기도 한다. 그 사이를 비집고 나온 실도 곳곳에 보인다. 그의 실은 적막한 이곳에서 가만히 서 있거나 망설이지 않는다. 그 대신 꿈틀거리기로 한다. 아주 천천히 그러나 쉼 없이 아래로 또 옆으로 사방으로 몸을 뻗는다. 

  이제와 함께 춤을 추던 사람들도 슬그머니 몸을 내비친다(<우리의 춤은 늘 뜻밖에 찾아오지>). 하지만 아직도 너무 멀리 있다. 너무 멀어 그들의 춤이 자꾸 흩어진다. 그때 아이가 불쑥 튀어나와 이쪽으로 뛰어온다. 거칠고 빠르게 그려진 붓질을 가르고 <공>을 차며 그림을 찢고 나온다. 이제 아이의 표정이 보인다. 아이는 공을 차기 위해 발을 든다. 

  전시된 작품은 모두 미세하게 달싹거리며 천천히 움직인다. 이들을 좇다 보면 어느새 어둠에서 벗어나 저 멀리 산을 보게 되고, 꾸물대는 실을 따라가다 뛰어오는 아이와 마주치기도 한다. 이들의 느릿한 움직임은 반복되는 절망에 둔해진 감각을 깨운다. 전시의 제목은 '그곳'의 안개를 가리키며 마침내 깨어난 우리의 눈과 귀를 더 멀리 두도록 이끈다. 

  '그곳'이라는 단어는 앞에서 이미 이야기한 곳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듣는 이에게 가까운 곳이라는 의미도 있다. 기획자, 작가, 관객은 모두 말하는 이면서 듣는 이가 된다. 여전히 이곳은 깜깜하다. 하지만 이제 그만 여기에서 눈을 떼고 저기 먼 곳을 보았으면 한다. 안개가 짙어 그 끝이 안 보일지라도 더듬거리며 잃어버린 감각을 되찾았으면 한다. 그렇게 천천히 가다 보면 곧 종착지에 닿을 것이고 우리가 있는 이곳과 당신이 있는 그곳의 안개는 이내 걷힐 것이다. 

_전그륜(합정지구 큐레이터)

촬영 : 타별 

디자인 : 이산도

​공간디자인 : 권동현 권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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