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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몇 년 전부터 노동을 제대로 인식하기 위해 고민해 왔다. 이 고민은 나의 삶을 통하여 자연스럽게 다가온 것 같다. 여하튼 이러한 고민에서 시작돼 《역사는 더 나쁘게 과거를 반복한다》를 기획했고, 이 제목은 『눈먼 자들의 국가』에 실린 소설가 김연수의 「그러니 다시 한번 말해보시오, 테이레시아스여」에서 빌려 왔다.

 

노동은 인간의 생존에 있어서 주요한 조건이지만 자본경제 안에서는 항상 착취의 대상이다. 현대 사회에서 직업은 안정적인 위치의 따라 직업의 계급화가 일어났고 이러한 현상에 적응하지 못한 인간은 경제적 사회 구성체에서 '버티기'가 어렵다. 그래서 오늘날과 같은 신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노동과 노동 환경 그리고 노동 없는 생산과 착취의 삶에 대하여 회화라는 조형 언어로 이야기 해보고 싶었다.

 

《역사는 더 나쁘게 과거를 반복한다》는 산업화가 일어난 후 지금까지 변하지 않은 시스템을 말한다. 산업화 이후 인간은 언제나 불안에 떨어야 했고 정주하지 못한 삶을 살아간다. 현재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이념도, 정치도 아닌 '자본'이다. 이러한 시스템 안에서 나는 어떻게 착취를 당하고 있는지를 알고자 했다.

 

_정덕현 

밤과 안개

: 정덕현, <역사는 더 나쁘게 과거를 반복한다>展

 

 

 

눈뜨지 않고도 / 빛깔을 식별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 내 손가락은 얼마나 많은 사랑을 스쳐왔던가

- 김선우,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 중에서

 

00. 반복

“어떤 설명이나 묘사될 수 없는 공포가 계속됐다.” 그럼에도 “우린 그 표면 밖에 보여 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이 무력감 앞에서 정덕현은 멈추지 않는다. 표면이 명증한 이야기로 고착되어 판단되기 전에 정덕현은 다시 붓을 댄다. 아직 마르지 않은 종이는 자신에게 다가온 또 다른 자극(먹)을 받아들인다. 어느 방향으로 어떻게 확장될지 모르는 먹의 움직임이 대상의 경계를 지운다. 쌓이는 것이 아니라 흐트러진다. 대상으로 향하던 표면의 말이 단단해지는 것이 아니라 말을 잃는다. 어쩔 수 없이 대상에 대한 사유를 다시 시작해야 한다. 다시 묻는다. 너는 누구인가? 너는 왜 내 앞에 있는가?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 자꾸 살피고 더듬는다. 그리고 이를 ‘반복’한다. “파괴하되 생산적”인 이 ‘반복’은 정덕현의 작업에서 중요하다. 쓰고-지우고-생각하고-쓰고-지우는 이 과정은 무의미하고 지난해 보인다. “가끔은 평화로운 풍경처럼 살만한 세상이 멀지 않은 듯” 보이지만, 공포는 여전히 계속되는 상황에서 정덕현이 찾은 생존전략이다. 설명이나 묘사 될 수 없는 공포 앞에서 삶의 방향은 나를, 너를 살피고 더듬는 것을 ‘반복’하는 것이다.

 

01. ‘고수(固守)’ 아닌 ‘수고(愁苦)’

정덕현의 첫 전시는 2013년 gallery101에서 열린 <검은 사각형>展이다. 당시 기획자(이대범)는 참여 작가에게 자신의 창작방법론의 지향 혹은 탈주를 근간으로 검은 사각형 제작을 요구했다. 기획자는 검은 사각형을 어떠한 당당함보다는 미로에서 마주한 떨림, 긴장, 부유, 방황, 우연, 어리둥절함이기를 희망했다. 정덕현은 이 전시에서 제도지에 다양한 연필(6H, 4H, 2H, HB, 2B, 4B, 6B)을 사용해 실 꾸러미를 기록했다. <검은 사각형: 억압하다>(2013)는 제도지와 자신의 몸 사이에 놓인 연필에 변화를 주면서 대상과 자신의 관계를 매번 새롭게 바라본 것이다. 7장의 드로잉을 하는 동안 정덕현의 그리기는, 정확히 말하면 몸의 움직임은 매번 변했다.

정덕현에게 연필은 대상을 재현하는 도구가 아니라, 익숙한 언어를 억압하는 작동원리이다. 연필의 질감에 따라 작가의 그리기는 변해야 했다. 오히려 자신에게 “익숙한 증상을 감춰”야 했다. 그것은 제도지와 자신을 매개하는 연필의 질감에 기반을 둔다. 자신의 언어 자체를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연필의 질감이 주는 자극을 수용한 자신의 몸을 기록한 것이다. “메시지는 바닥에 떨어진다.” 어리둥절함이 주는 이 언어에 기대어 정덕현은 자신을 자극하는 것에 귀를 기울이고 이에 예민하게 반응하며 잃었던 무엇인가를 회복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쩌면, 정덕현은 “믿지 못하거나 곧 잊어버릴 수도 있는” 것들 까지도 익숙한 자신의 언어를 점검하는 요소로 사용했다.

 

02. ‘바르게 살자’

2014년 경상남도 산청 성심원에서 열린 <지리산 프로젝트 : 우주 예술의 집>의 전시 속의 전시 <배운 언어, 배우는 언어>(별.별.밤. 기획)에 참여한 정덕현은 기획자가 제시한 걷기, 그리기, 사유하기를 수행했다. 성심원이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소통의 어려움과 힘겨움에 대한 전시였던 <배운 언어, 배우는 언어>에서 정덕현은 무심히 드로잉 한 점을 제작했다. 하늘에서 수직으로 내려다 본 나무를 그린 <내려다 본 향목>(2014)에는 글귀가 적혀 있다. ‘2014년 8월 14일 성심교를 건넌 후 향나무를 그렸다. 위에서 본 적은 없지만, 위에서 본 나무를 그렸다. 이렇게 생겼을 것 같아서’라는 짧은 문구는 대상에 대한 작가의 고민을 드러낸다. 본 적이 없는 시선으로 나무를 그린 후 ‘이렇게 생겼다’는 확고부동(確固不動)한 진술이 아닌, ‘생겼을 것 같아서’라는 변화 가능한 진술을 남긴다. 대상에게 다가가 한 번에 포획하여 작품으로 담아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대상과 거리 두고 있음을 인정한 것이다. 유보적인 태도이지만, 어쩌면 ‘나는 아무 것도 모른다’는 솔직한 윤리적 고백이다.

안다고 말 할 수 있을까? 재현한다고 해서 대상이 내 것일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해 긍정적인 대답을 내린다면 그것은 거짓된 희망이자, “환상이다.” 고작해야 “벽돌로 된 공동 침대와 고통스러움 꿈”의 표면 정도를 보여 줄 뿐이다. 그럼에도 “난 책임이 없습니다, 난 책임이 없소, 난 책임이 없다”라고 말한다. 대신 정덕현은 변화 가능한 진술을 통해 전적으로 자신의 윤리적 문제/책임을 통감한다. 이 자백은 고스란히 <낙서>(2015)에 새겨진다. 어딘가에 붙어서 누군가와 함께했던 삶의 내력을 지녔을, 그러나 현재는 무참히 버려질 운명에 놓인 철근 콘크리트 덩어리가 표지석(標識石)처럼 좌대에 놓여 있다. 궁서체로 ‘바르게 살자’가 있음직한 자리에는 작가의 고뇌가 담겨 있다. ‘관찰자가 될까봐 경계하고, 프로파간다도 아닌 이도저도 아닌 나의 태도’ 대상을 한 번에 포획하지도, 그렇다고 모른척하지도 않으려는 정덕현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이 태도는 정덕현 그리기의 근간이다. 레타나 살레츨은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후마니타스, 2014)에서 이데올로기에 의해 ‘강요’된 선택의 모순에 대해서 언급한다. 선택을 함으로 얻어지는 것은 안정과 편의성이다. 하지만 정덕현은 선택을 거부함으로 파생하는 머뭇거림과 불안정을 통해 이데올로기가 숨기려 했던 “밤낮없이 계속되는 굶주림, 갈증, 질식, 광기”의 실체를 목격한다.

 

01+02. 역사는 더 나쁘게 과거를 반복한다: 가만히 있으라

2014년 4월 16일 TV로 중계된 장면은 정지된 화면을 장시간 보듯 지루했다. 망망대해에 배 한척이 기울어져 있었으며, 실시간으로 중계되는 장면을 매일매일 곳곳에서 봤다. 사실 그때는 기의와 기표의 약속이 이렇게 무참히 깨지고 있는지 몰랐다. 지루한 장면을 보면서 보이는 그대로 아무 일 없다고 믿었다. ‘가만히 있으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남기고 누군가는 빠르게 배를 떠났다. 그러나 수색이 중단된 2014년 11월 19일에도 여전히 9명은 배를 떠나지 못했다. ‘가만히 있으라’에는 그늘이 있었다. 4·16은 이를 가시화했을 뿐이다. 이전에도 누군가는 자신만의 안락함을 위해 ‘가만히 있으라’라고 말했다. 가만히 있어야 살 수 있다고 했다. 어쩌면 ‘가만히 있으라’는 누군가가 주변에서 늘 이야기 하고 있던 목소리였을지도 모른다. “그 허울 뒤에 숨은 게 뭘까?” 아무리 슬퍼해도 4·16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음은 자명하다. “피부에 영원히 지울 수 없는 표식을 남겼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게 남는 문제적 질문은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가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정덕현은 마르지 않는 상태에서 다시 붓을 댄다. 가만히 있으며 무언가를 굳건하게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까지 움직이며 ‘반복’한다. 당연지사 종이는 반응을 하고, 형상은 일그러진다. 어느 정도 형상이 구축되면 다시 붓을 댄다. 사물을 거대한 초상화처럼 다루는 정덕현에게 이런 행위는 무의미해 보인다. 하지만 이 ‘반복’은 생산적인 무의미이다. 대상을 직접적으로 표상하는 것을 두려워하면서 작가는 대상의 ‘옆’에 다가간다. 동일화가 아닌 ‘옆’에 머무르는 것은 완벽하게 이해 할 수 없음, 즉 그들의 절대적 외부성을 인정하는 윤리적 태도이다.

같은 화면에서 ‘반복’을 통해 그리기를 했던 정덕현이 같은 대상을 여러 번 그린 것은 미싱과 황국이다. 한국 근대화의 <기념비>(2012)적 기계인 미싱은, 어두운 <그림자>(2012)를 내재하기에 <피에타>(2013)이다. 노동(과 노동자, 노동환경)은 자본에 종속된다. 착취에 가까운 이러한 종속은 지금도 반복되는 문제이다. 정덕현은 반복을 반복함으로 이 문제가 개인의 문제가 아닌 시스템의 문제임을 자각하고 다가간다. 한 마디로 표상하여 누군가를 고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문제로 인식하고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지에 대한 답을 찾는다. 지난하게 덧칠하고, 흘리고 그 자극을 수용하고 몸에 체화하면서 고통스럽게 몸을 움직인다.

<황국>(2015)은 같은 제목의 두 작품이다. 각 작품은 삶과 죽음의 상태에 놓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작업은 그 전 작업과는 차이가 있다. 이는 목탄이라는 재료적 차원이 아니다. 그간 정덕현의 작업은 ‘반복’을 하는 과정에서 형태가 흐트러지고 이는 다시 대상에 대한 사유를 야기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작가의 고민과 번뇌가 추상적으로만 드러났다. <황국>의 가치있음은 선과 선이 충돌하면서 긴장의 장으로 화면이 구축됐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어느 것이 우위에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정덕현은 그 어딘가에서 끊임없이 움직이며 비가시적으로 자신의 몸을 억압하는 것들을 힘겹게, 힘겹게 가시성의 영역으로 끌어 올린다. 자명한 것은 역사는 더 나쁘게 과거를 반복하므로 정덕현의 움직임은 더욱 더 힘겨워진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움직일 것이다.

 

01+02. 역사는 더 나쁘게 과거를 반복한다: 세상은 속력을 요구한다

“한 국가는 한 목소리를 내”려 한다. 그들의 “슬로건만큼 소름끼치는 건 없다.” 자기계발서가 지배하는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는 삶에서 ‘잠’까지 추방하며 가만히 있는 것 자체를 거부한다. 신자유주의는 실제적인 휴식 상태인 잠을 '절전대기' 상태로 전환한다. “기계가 작동을 시작한다.” <오와 열>(2015)을 맞추고 <오른쪽 왼쪽>(2014)으로 규칙적으로 움직이며 “불만도, 불평도 없이 일에 착수한다.” 피로로 지친 육신은 “붕대 감은 손으로 노동을 계속한다. 한 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 문이다.” 노동의 주체는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는 자본의 <대리인>(2015)이 된다. 음소거 된 <묵음>(2014) 상태이다. 자본은 <모가지>(2015)를 담보로 삶을 장악한다. 자본의 요구에 빠르게 더 빠르게 움직여야/변해야 한다. <목이 막히다>(2015)처럼 제 임무를 충실히 다하고 있지만, 세상은 속력을 요구한다.

1933년 2월 17일 『동아일보』의 기사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스피드 행진곡, 자동차 등살에 인력거 수난’이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자동차의 등장으로 인력거는 스피드 경쟁에서 밀린다. 일자리를 잃은 인력거꾼들은 ‘세상은 속력을 요구한다’라는 핏켓을 들고 시위를 펼친다. 80년 전, 인력거꾼들의 생존을 건 ‘세상을 속력을 요구한다’라는 외침은 결코 고리타분한 목소리가 아니다. 취업(사회 진출)을 위한 무한경쟁 사회는 연대보다는 경쟁을 강요한다. (무의미하게) 가만히 있지 말고, (유의미하게) 빠르게 변할 것을 요구하는 지금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속력을 따라가지 못했을 경우 제시되는 실업은 오롯이 ‘열심히 하지 않은’ 개인의 문제, 즉 <스스로 알아서>(2015)해야 하는 문제로 환원한다. 말을 할 수도 없고, 말을 한다고 해도 ‘?’만 남는 거대한 소통 불가능의 <장벽>(2015)이 도사리고 있다. “피는 말랐고, 혀는 침묵에 빠졌다.”

거대한 장벽 앞에서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까? 초가 막 꺼진 상태를 그린 <묵음>은 이중적이다. 온 몸을 녹여 말을 하던 초가 강력한 무언가에 의해 음소거 됐다는 측면이고, 또 다른 하는 완벽하게 꺼진 상태가 아닌 막 꺼진 상태, 즉 여전히 온기가 남아 있고, 최후의 순간까지 말을 한다는 점이다. 꺼졌으나 꺼지지 않는 상태에 <묵음>이 놓인다. 모서리에서 <흔들>(2014)리지만, 그럼에도 버틴다. 그러나 ‘버팀’ 그 자체에 정당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버팀으로 멈춤이 아니다. 정덕현은 꺼졌으나 꺼지지 않는 상태를, 버티지만 끊임없이 흔들리는 상태를 지향한다. 요구하는 속력에 순응하지 않음으로 속력의 실체를 마주한다.

 

다시 00. “수용소의 잔디는 다시 무성해졌다”

상이해 보이는 ‘가만히 있어라’와 ‘세상은 속력을 요구한다’는 ‘무력함(helplessness)’을 야기한다는 점에서 닮아있다. 신자유주의의 과도한 경쟁, 부채사회가 야기한 벗어날 수 없는 ‘영원한 현재’, 그리고 이에 따르는 실존의 위기는 도처에서 발견된다. 다시 질문을 던져 보자.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질문은 여전하다. (영화/글) <밤과 안개>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전쟁은 끝났지만 경계를 늦춰선 안 된다. 버려진 마을은 여전히 위협적이다. 소각로는 사용되지 않고 나치의 교활함은 이제 애들 장난으로 여겨진다. 이곳을 떠도는 9백만 명의 원혼에도 우리 중 누가 이 괴상한 감시탑에서 새로운 처형자들의 도래를 경고할 것인가? 그들의 얼굴은 진정 우리와 다를까? (중략) 우린 진정한 시선으로 잔해를 살폈지만, 옛 괴물이 돌무더기 아래 영원히 깔려 버린 듯 과거를 잊고 희망을 찾은 척한다. 마치 수용소의 상처를 한 번에 치유한 듯, 마치 단 한 번의 과오처럼 꾸미고 있다. 우리는 눈을 들어 살피지 않고, 인류의 끊임없는 울부짖음을 듣지 않고 있다.”

_이대범 (미술평론가, 전시기획자)

 

정덕현 개인전

역사는 더 나쁘게 과거를 반복한다

2015.8.14 -

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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