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화에 묻다 - 전혜림의 작업에 관하여
우리가 '회화'라고 부르거나 생각하는 개념의 접점에는 일일이 열거하지 않더라도 몇 가지의 범주가 존 재한다. 그리고 이 다양한 범주. 를 모두 포함하고 있는 완전한 회화란 있을 수 없다. 이는 알렉산드리아 서고 안의 모든 책으로 만든 한 권의 책이란 있을 수 없는 것과 같다. 하지만 이 범주의 유기적인 정의와 경계가 회화의 역사를 만들어 온 것은 분명해 보인다. 누군가 회화를 미술사의 영웅이라 칭했. 듯, 그 역사 는 예술의 역사 상당 부분을 아우르고 있다. 회화사를 제외한 미술사를 생각해 보라.
결국 회화는 그 범주를 어떻게 규정하거나 경계 지을 것인가를 둘러싼 일종의 투쟁과 논쟁의 결과이다. 이는 '새로움'이라는 신화를 즐. 겨 만들어 왔지만, 오늘날 회화가 직면한 것은 새로움의 양태가 아닌, 역사 화된 익숙함의 양태와 어떻게 거리를 둘 것인가의 문제가 되었다. 그리고 전혜림은 이러한 결별을 위해 과감히 미술사를 호출해 왔다. 앞서 언급한 완전한 회화의 불가능성과, 그럼에도 계속해서 찾아 나가는 잠정적 답변들을 섬세히 복기하는 과정을 선택한 것이다.
1.회화적 재귀
회화가 회화인 것과 회화가 그에 대해 말하는 것은 다르다. 회화를 회화이게 하는 것에는 역사를 통해 구축된 통시적 인식이 존재한다. 그러나 회화가 자기 자신을 지시하는 행위는 스스로를 매개이자 주제로 삼는다. 이를 위해서는 회화가 무엇인가에 대한 관례적인 검토가 필요하고, 그 가운데 석회화된 의미에 대한 성찰이 선행된다. 역사나 신화가 된 이미지를 현재에 다시 호출하는 행위는 이미지를 시대적 맥락에서 떼어낸 절충주의적 묘수로 보일 위험성, 동시에 역사화와 신화화를 파기하기 위한 아방가르드적 행위라는 양면을 지니고 있지만, 어쨌든 현재의 요인을 과거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찾으려는 시대 인식을 바탕에 둔다.
전혜림이 과거의 명화를 언급하는 것은 회화의 문제가 아직 소진되지 않았음을 증명하기 위한 장치로 보인다. 또한 자신이 이미 구축된 사회사의 기호들 속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에, 신적 창조와 연계된 작가의 자의성을 신뢰할 수 없다는 의구심이 수반된다. 다시 말해 예술가는 어디까지나 역사적 존재이며, 역사의 끝이자 시작인 동시대의 축에서 운동하는 존재라는 인식이 작용하고 있다.
따라서 전혜림이 명화로의 역행을 시도한 것은 '회화'가 획득한 개념적 관례의 좌표를 검토하기 위해서이다. 어떠한 기호에는 반드시 공시적 성격을 갖는 내적 합의가 필요하며, 역사의 경계 안에 존재하는 명화란 결국 회화의 관례를 형성해 온 주체이다. 그러나 동시대의 화가가 그 특징을 검토해 들어가는 행위는 '회화'와 '명화'의 결합을 통해 형성된 역사적 합의를 반성적 기제로 설정하고, 이를 개별적 재현의 임의성이라는 변덕스런 판단과 떼어내려는 시도이다. 따라서 그의 작업은 '그리는 행위'가 가진 능동성을 어디까지나 자유로운 표현의 영역으로 보기 보다, 자신의 행위 안에서 표출되는 다양한 회화의 특성에 대한 예민한 반응이자 대응으로 만든다. 이 경우, 자신의 회화가 어디까지 확장 될 수 있는가에 대해 숙고하고, 또한 확장된 그 상태가 과연 회화의 영역에서 어떠한 성격을 갖는가를 잠정의 도착점 으로 삼는다. 그러나 작가가 할 수 있는 것을 모두 소화/소진할 수 있는가의 여부는 그의 회화가 결코 완결 형태의 종지부가 될 수 없음을 확인해 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것은 또한 어느 작가와 작품을 위치 짓는 역사적 필연성과 현재진행형의 유동적 상태 간의 교류와 관련된다. 전혜림은 동서양의 명화들의 이미지를 부분적으로 차용하고 변형시키는 것을 통해 가급적 회화라는 기호의 총체적 구조를 점검하고, 그것을 변용 가능한 어휘로 이용한다. 언어는 결코 고정되지 않으며, 동일한 기호의 요소의 재배치, 재조합을 통해 새롭게 형성된다. 회화 역시, 미술의 역사가 오늘의 화가가 해야할 일을 선점한 것이 아니며, 오히려 지금 여기에서 조밀하게 펼쳐지는 이미지의 공시적 밀도가 역사적 기호의 변형과 진화를 주도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전혜림은 오늘의 회화를 복기함과 동시에 구축하는 데에, 회화의 표면 위에서 일어나는 재현의 역사와 물리적 구축의 동시적인 발화를 선택한다. 그리고 전자는 재현의 역사에서 흔히 반복해서 다루어 온 '낙원'의 메타포를 통해, 후자는 회화의 매체적 질료의 공간적 환원을 통해 나타난다. 이는 재현의 인덱스와 구조의 인덱스가 서로 교차되는 지점에서 이루어지며, 회화의 통시성과 공시성이 교차하는 동시대 회화의 성격을 함축한다.
2. 나르카디아
재현의 대상이 어떠한 상태를 온전히 표상하여 하나의 완벽한 현존을 이루어내는 것이 가능한가? 다시 말해 어떤 회화가 완전하고 충만한 회화 그 자체를 실현할 수 있는가는 결국 수많은 이의를 안은 채, 자의적으로 도달한 비평적 정의일 수밖에 없다. 전혜림은 회화와 재현을 둘러싼 이러한 잠정적 자의성을 미적 완전의 상태로 치부하려는 태도를 경계한다. 왜냐하면 결코 그 자체로 완벽한 상태에 이르거나 모든 회화의 특성을 수렴할 수 있는 회화란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는 시대의 자식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도달할 수도 존재하지도 않는 낙원, 아르카디아의 불가능성과 그 은유로 이름 지어진 '나르카디아'이다.
전혜림의 나르카디아는 완전한 회화의 불가능성을 자신의 회화를 구축해가는 지점이 되며, 이는 그의 작업을 관통하는 서사의 성격을 갖는 동시에 그가 회화에 접근하는 태도를 아우르고 있다. 예컨대 <그건 거기 없는데>는 낙원 이미지를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쉽게 찾을 수 있는 상투적인 이미지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화면 위에 그려진 이 낙원 이미지에서 의미가 생성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낙원이라는 말과 이미지의 관성이 회화에 대한 느슨한 보편성과 연결된다. 회화를 회화이게 하는 정해진 약호들이 낙원의 일반적 기표들과 관계하면서, 통상적으로 믿거나 정의되는 지점들이 기실 비판과 숙고의 과정을 상실한 관습의 힘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한편 낙원 이미지와 일반적 관습에 균열을 일으키는 것은 회화를 이루는 물리적 속성과 구조의 재배치를 통해 나타난다. 회화는 (대체로 사각인) 평평한 화면, (온갖 색채와 물성의) 물감, 각종 툴(tool). 거기에 일반적으로 '그린다'고 일컫는 행위의 과정을 거쳐 벽 또는 바닥이 있는 공간과 밀착/밀접한다. 그러나 전혜림은 캔버스의 바탕이 되는 천의 구겨짐, 늘어짐과 같은 질료적 특성이 팽팽한 회화의 평면에 내재한 변용의 성격임을 보여준다. 더불어 평면을 지탱하는 지지대의 프레임이 바닥 위에 직립 가능한 입체의 속성을 지니고 있음을 드러내면서, 다양한 화면 크기의 조율과 반응, 그 사이의 위치와 거리를 통해 현실의 원근 관계를 구성해 간다.
이는 화면 안에서 일어나는 대상의 일루젼과 미메시스에 대한 시선의 수용 방식을 회화의 물리적 구조가 현실 공간 안에서 일으킬 수 있는 경험의 영역으로 확장시킨다. 따라서 흔한 낙원 이미지, 즉 완벽한 회화의 불가능성은 외적 공간으로 튀어나오고 또 파괴되면서 회화의 한계에 대한 극복의 시도와 결의한다. 그것은 결국 회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회화가 무엇이 될 수 있으며, 또 어떻게 확장될 수 있는가에 대한 재인식을 제안한다.
특히 <그건 거기 없는데 #2>는 보다 강렬한 붓질, 표현 방식의 뚜렷한 층위의 겹침과 펼침 속에서 구조적으로 확장하려는 공간을 구현한다. 이 작품은 전작에 비해 화면을 보다 능동적인 장(場)으로 상승시키고, 이미지 사이의 관계항과 이로 만들어진 공간들 간의 유기적인 조응을 이루어낸다. 이러한 조응 사이에는 상투적 낙원 이미지와 역사적 회화들의 낙원 이미지 사이의 긴장이 자리한다. 회화적 이상과 회화를 두고 벌어진 개념적 합의들, 그리고 이를 낙원이란 모티브로 환원하여 운동하는 표면은 다시 한번 외적 공간으로 구축되는 것이다.
회화의 표면과 화면의 배치를 통한 물리적 공간의 확장은 자연히 회화에 대한 경험의 단층을 변화시킨다. 요컨대 <그건 거기 없는데>와 <그건 거기 없는데 #2>에는 모두 프로젝터로 환등하여 그린 반복적인 텍스트가 나타난다. 이것은 회화적 경험의 공간을 표면에서 일어나는 환영과 표면 밖에서 일어나는 현실 공간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시점의 원근 관계를 흩어 놓았다가 다시 모으는 기능을 한다. 따라서 전혜림의 회화에서 표면과 배치, 공간과 현존과 같이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는 경험의 풍경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3. 미완의 인덱스
분명한 것은 전혜림의 회화가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는 점이며, 그의 이전 작업과 현재의 작업은 제법 뚜렷한 목적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완전한 회화의 불가능성을 능동의 상태로 바꾸는 일이다. 불가능성이 목적이 된다는 것은 충분히 예측되는 좌절을 전제로 하는 것이지만, 이런 좌절이 또한 끊임없는 생성을 이루어내는 가능의 영역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회화가 지닌 극도의 예민함은 여전히 치열한 문제이며, 회화의 클리셰는 극복과 사유의 대상이지, 성급한 냉소나 종언과는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종결 되지도, 종결될 수도 없는 회화의 현재성을 역사적 피로감과 맞바꿀 수는 없다는 것이다.
특히 그의 화면에서 명화의 파편적 기호들은 비밀스럽게 혼재하고 있으며, 이는 구체적인 명확성을 갖지 않는다는 점에서, 과거 포스트모던 회화가 절충주의이자 새로움에 대한 역사적 실패와 관련된다는 프레드릭 제임슨이나 할 포스터의 회의론을 피해간다. 오히려 그의 화면이 빚지고 있는 과거의 기호들은 완전한 회화의 불가능성이 전제하는 증거의 역할을 하며, 비관이라는 부정의 태도만이 잉태할 수 있는 새로움의 관성, 즉 변증법적 진화와 연계한다.
요컨대 전혜림은 그가 발견할 수 있는 회화의 구조에 관한 모든 전제들을 수렴한 뒤, 이를 해체시키고, 다시 구축해 나아간다. <Perfect skin> 연작은 회화의 표면에서 일어나는 재현의 과정과 이것이 파기되면서 드러나는 회화의 물리적 구조의 문제가 더욱 고조되어 상호작용하고 있다. 먼저 인터넷에서 낙원이라는 검색어로 쉽게 찾을 수 있는 상투적인 낙원이미지가 화면 위에서 느슨한 관습들을 지시한다. 이것은 다시 동서양 명화들의 자연 이미지와 결합하는데, 이로써 화면을 가득 채운 문화적 혼재는 명확한 재현의 대상과 멀어지며 회화의 표면의 문제로 서서히 이행된다.
따라서 회화의 표면에 대한 그의 실험은 화면의 '위계'의 개념으로 진전된다. 각기 다른 질감과 밀도로 이루어진 다층적이고 불규칙한 화면들의 상충과 중첩은 회화의 조화와 통일에 강력한 파열음을 내면서 보편적 회화성의 신화를 해체하고자 한다. 특정한 완결을 위해 단층을 형성해가는 이미지와 물감, 그리고 행위의 과정을 회화에 대한 한계와 결핍으로 상정하고, 각기 다른 해상도의 위계로 흐트러뜨린 채, 이를 다시 경험의 총체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나는 이 작품에서 전혜림의 작업에 새롭게 나타난 어떤 시간성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는 그가 과거 미술사의 기호들을 선택하며 보여주었던 서사성과는 다른 것으로, 회화의 '과정'적 문제를 표면의 전언으로 바꾸며 등장한 시간성이다. 그리고 이 표면의 시간은 앞서 언급한 공간과 결합하며, 또다시 진화를 거듭하게 된다. 진화는 회화에 관련된 선험적 수용을 의심하고 실험하여 진행형의 경험으로 이끌어낼 때 가능하다. 이를 위해 그의 작업은 회화와 관련된 자신의 인식을 거듭 통찰하며 구상의 형식적 토대를 보유해 나간다.
레비-스트로스는 예술적인 것이 언제나 대상의 어떤 차원을 포기해야 함을 지적하면서, 실체를 전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하여 우리는 항상 부분에서 시작하는 경향이 있으며, 그 대상이 우리에게 주는 저항은 그 저항을 분할함으로써 극복된다고 설명한다.1 회화가 자신의 물리적 속성을 포기하면서 보여주는 재현의 세계는 표면에서 일어나는 불안하고 유기적인 관례의 장으로 균열되면서 재현의 지시 대상을 부정하는 상태로 나아간다. 그리고 전혜림은 이러한 표면의 복잡성을 'perfect skin'이라는 역설로 명명하여 완결된 회화의 불가능성을 재차 강조한다.
이 과정에서 회화의 표면은 재현의 장이 아닌, 화면을 지지하는 특정한 공간으로 변화한다. 재현된 대상으로 환원되어 늘 전혀 다른 세계를 지칭하던 표면의 인덱스가 스스로를 가리키기 위해서는 하나의 단일한 화면이 아닌 다양한 표면들 사이의 차이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재현된 대상을 향해 나아가려는 화면의 저항과 회화의 물리적 속성을 지시하려는 표면의 저항 사이의 긴장은 전혜림이 수렴한 전제들을 구축해가는 구심점이 된다.
회화는 두가지 요소, 즉 재현된 세계와 물리적 장치의 결합을 통해 존재한다. 하지만 이 결합이 동시에, 동일한 비율의 완벽한 균질로 이루어질 수 있을까? 만일 역사적 명화들이 회화에 관한 인식을 구축해 왔다면, 그것은 화면 위에서 지시하는 어떤 세계와 밀착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의 작업은 이러한 밀착을 떼어내어 회화에 관한 확언의 명징함을 비어있는 인덱스로 만듦으로써, 회화의 물리적 구조가 재현과 최대한 동일한 비율과 동일한 특권을 지니도록 한다.
이러한 균형의 상태, 그것이 비록 완전한 공존이 아니라 할지라도, 재현과 구조라는 양가성의 균형은 이상적 회화에 근접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론이 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일루젼은 현실의 물리적 지지대라는 모순 속으로 전개된다. 재현을 통한 가상을 넘어 회화 자체가 현실이 될 때, 하여 화면 속의 원근이 현실 공간의 경험적 원근과 중첩될 때, 회화는 프레임을 넘어선 공간적 좌표를 얻게 되는 것이다.
왜곡된 낙원의 이미지는 예측불가능한 방향으로 현실의 공간 속에 뻗어나간다. 이 확장의 과정에서, 회화에 관한 역사적 동기로부터 구축된 이미지는 와해되어 수용된다. 중요한 것은 회화사에 대한 전혜림의 접근은 신화의 복구가 아닌 형식의 갱신이라는 점이며, 이는 회화를 둘러싼 다층적 전제들을 검토해가는 방식에서 비롯된다. 또한 이것은 오늘의 회화는 언제든 자물쇠 없는 과거의 창고에서 약호화된 이미지들을 차용하고 때로 부수며 동시대성을 획득할 수 있다는 편의적 발상과의 결별이기도 하다.
4. 뼈아픈 명제
회화를 둘러싼 변화와 존속의 대등한 싸움을 늘 있어왔고, 그 긴 역사만큼 회화는 수많은 종류의 미완을 축적해왔다. 그리고 회화란 무엇인가에 관한 답변들은 반드시 어느 하나의 특성에 관한 배제와 포기를 전제로 한다. 전혜림의 회화가 지향하는 지점은 어떤 배제나 포기가 없이 닿을 수 있는 회화의 어떤 상태이다. 이를 위해, 완전한 회화의 불가능성은 무한한 가능성을 발견하기 위한 전제가 될 터이나, 자신의 회화 또한 결코 낙원에 도달할 수 없다는 뼈아픈 명제의 부조리를 지고 가야만 한다.
그럼에도 그의 회화는 끊임없는 변용 속에서 추론할 수 있는 '회화'에의 재고이자 채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종합적인 수렴의 태도에서 나는 문헌학자와 같은 꼼꼼한 추론의 태도를 본다. 화가의 이러한 태도는 때로 오독을 낳을 수 밖에 없겠지만, 바로 그 오류의 지점에서 예측불가능한 새로운 언어가 나타난다.
문학자 김현은 "삶의 전체성이란 모든 것을 향한 움직임 속에서 구현되는 것이지, 자기 속에서 삶을 끼어 맞출 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라고 썼다.2 회화가 삶은 아니나, 전혜림이 회화를 찾아 나서는 이유는 그 궁극을 목적한 것이 아닌, 그것을 향한 움직임 속에서 발견되는 것들의 총체를 통해 마련된다. 즉 회화에 관한 정의를 향함이 아닌, 회화의 의미 속에 또다른 흔적을 새기어 간다.
_구나연(미술비평가)
1. 레비-스트로스, 야생의 사고, 안정남 옮김, 한길사, p. 78-80.
2. 김현, 『전체에 대한 통찰』, 「젊은 시인을 찾아서」, 나남문학선 30, p. 215.
2019 6 22 - 7 21
사진 : 김상태
디자인 : 도영
전혜림 개인전
육면체의 인덱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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