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묘한 신체와 미약한 신체, 그리고 모서리의 입
전시의 제목에서부터 글을 시작해보자. ‘모서리의 입’. 이 제목은 기획자인 이제와 2인전의 두 참여 작가인 안수인과 장자인이 머리를 맞대고 생각해 낸 것이다. 시적인 이 제목이 뜻하는 바는 무엇일까? 영문 제목이 ‘Mouth at the Corner’인 것을 볼 때, 구석에 있는 입이라는 뜻인 것 같다. 그럼 구석에 입이 있다는 것은 또 무슨 의미인가? 여전히 수수께끼 같은 전시의 이 제목은 두 작가의 작품을 거쳐야 의미가 떠오를 것이다.
1. 신체를 그린 그림과 신체가 없는 그림 안수인과 장자인의 그림에서 신체는 동일하게 어떤 특별한 의미를 부여받는다. 그러나 두 작가가 신체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은 정반대이다. 안수인의 작품에 신체가 직접적으로 재현된다면, 장자인의 작품에는 신체가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부재함으로써 신체의 존재감이 부각된다. 안수인의 작품에서 신체가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의 드로잉 작품들은 거의 모든 경우 인간을 재현한 것이거나 최소한 그것을 닮은 형상을 포함하고 있다. 이번 전시작 또한 모두 인간의 얼굴이나 장기, 혹은 신체의 일부를 묘사한 연필 스케치를 바탕으로 제작된 그림이다. 물론 신체를 그린 안수인의 그림이 일반적인 초상화 기법으로 그려진 것은 아니다. 그가 그린 신체는 공통적으로 어딘가 낯설고 그로테스크한 느낌을 자아낸다. 안수인은 작가노트에 “신체라는 공간이 허물어지는 틈 사이에 물리적으로 전혀 경험할 수 없었던 존재들을 작업 안에 배치시켜 놓음으로써 … 신체적, 감각적 세계를 새롭게 구현해보고자 한다”고 썼다. 이러한 그의 의도를 구현한 것으로서 이번 전시에 포함된 그림은 다음과 같이 크게 두 종류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는 <표정연구> 연작으로 번지는 효과를 활용하는 그림이다. 이 연작에서 그는 스케치를 한 다음에 여러 차례에 걸쳐 그 위에 물감을 입힌다. 그런데 이 때 이전에 바른 물감이 마르지 않아 자연스레 번지는 것을 그대로 둔다. 그리하여 얼굴의 형태는 기묘함을 넘어 공포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일그러지고 왜곡된다. 둘째는 <몸 꽃> 연작으로 여기에는 장기나 신체의 특정 부위가 동물이나 식물과 함께 나타난다.
현실에서 장기나 신체의 일부가 동물이나 식물과 함께 놓여 있을 경우는 그것이 토막 나고 버려져서 어딘가에 방치되었을 때 밖에 없지 않을까? 하지만 버려진 것으로 보기에 이들은 너무나 생기 있고 매혹적이다. 이처럼 낯설고 그로테스크한, 그렇지만 때로는 매혹적으로 느껴지는 안수인의 신체 재현이 뜻하는 바는 무엇일까? 안수인이 묘사한 신체에 관해 보다 깊은 이야기를 전개하기 전에 잠시 장자인의 신체 재현을 살펴보고 넘어오자. 신체에 대한 장자인의 관심은 안수인의 것과 달리 다소 역설적인 방식으로 나타난다. 그는 기술적인 면에서만 보면 사실 신체를 그리지 않는다. 이번 전시작에서도 인물은 찾아보기 어렵다. <집에 들어와서 앉으면>이나 <수색역 앞>, 혹은 <밤버스> 정도에만 얼굴이 가려지거나 흐릿하게 묘사된 인물 몇 명이 등장할 따름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그림은 근본적으로 신체에 대한 의식과 함께 나타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인간의 형상을 그리지 않는다는 사실이 오히려 그가 인간적인 형상에 대한 관심을 갖고 그와 관련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역설적인 증거처럼 느껴진다. 이렇게 말해 보면 어떨까? 장자인은 신체를 직접 그리지는 않지만, 신체가 머물렀던 공간을 그린다고 말이다. 그가 2014년에 그린 <현관을 나서다가>에서 이를 단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일반적인 가정집의 현관을 그린 이 작품은 어느 날 집을 나서다 문득 집 안에 홀로 있을 어머니에 대한 연민이 들었던 상황을 재현한 그림이라고 한다. 이 그림 속에 인물은 한 명도 등장하지 않지만, 아무렇게나 놓여있는 집 안의 사물들이 여느 가정의 일상 속의 체취(體臭)와 체온(體溫)을 느끼게 한다. 그러고 보면 그의 거의 모든 작품에는 이러한 체취와 체온이 남아 있다. 전시 리뷰가 아닌 서문에서 자세한 묘사는 생략해도 좋을 것이다. 그림 속에 체취와 체온은 매우 미약하게만 남아있지만, 그것이 나에게만 느껴지고 내 눈에만 보이는 것은 아닐 것이다.
2. 기묘한 신체와 미약한 신체
나는 안수인과 장자인이 재현한 신체를 각각 ‘기묘한 신체’와 ‘미약한 신체’라고 불러보려고 한다. 두 작가의 신체 재현 방식의 차이는 작업에 임하는 태도의 차이에서 비롯한다. 안수인의 경우 여성이라는 자신의 성별이 태도를 결정하는 주요 변수라면, 장자인은 도시 속의 삶이 그에 해당한다. 장자인의 미약한 신체에 관해 먼저 말해보자. 이는 도시의 공간을 새롭게 분절하려는 그의 생활 태도에서 발생했다. 전시된 신작의 상당수는 그가 올해부터 머물며 작업을 시작한 홍제동 작업실과 그 주변의 풍경을 그린 것이다. 흔히 ‘달동네’라 부르는 지역에 위치한 그 공간을 같이 쓰는 또래 작가들은 종래에 있던 슈퍼의 이름을 따서 그 곳을 ‘버드나무 가게’라 부른다. 상대적으로 월세가 저렴한 지역에 공간을 얻어 간간이 텃밭을 가꾸며 그림을 그리는 생활이 그에겐 의미심장했던 모양이다. 그의 그림 속엔 도시의 비정함과 그 장소에서 그가 발견한 미약한 따뜻함이 공존하고 있다. 안수인의 기묘한 신체에는 모체(母體)가 있다. 바로 그가 대학시절에 그렸던 인물이다. 이 인물은 여성의 가슴과 여성의 성기를 가지고 있지만, 수염이 나고 다리엔 털이 있다. 또 목젖이 있으며 벌어진 어깨를 가졌다. 물고기에게 자신의 살을 내주기도 하고, 두개골 사이로 식물이 자라기도 한다.
안수인이 그린 이 괴물 같은 신체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이것이 여성으로서 가지는 사회적 공포를 실체화 한 안수인의 분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이 신체가 등장하는 그의 그림이 일종의 차가운 유머라고 느꼈다. 안수인은 그림으로나마 제도로부터 축출된 존재가 되길 자처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 자발적으로 털이 나고 어깨가 넓은 여성이 되길 자처하고, 동식물의 경계를 넘나들고 생사의 구별이 애매한 존재가 됨으로써 자기 내부의 것을 포함한 사회적 규범을 통째로 비웃어 버리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기묘한 신체와 미약한 신체는 각각 성별과 계급의 측면에서 가장 주변부에 위치한 신체들이다. 그리하여 이들은 어떤 힘을 가졌다. 이들은 사회적 규범의 비속함을 폭로하는 동시에 비웃는다. 그리고 거기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기묘함과 미약함의 연대를 만들어낸다.
3. 모서리의 입
자, 이제 이 글을 열었던 전시의 제목에 관한 논의로 다시 돌아오자. 신체에 대한 두 작가의 태도를 검토하고 나니, '모서리의 입'이라는 전시명이 보다 흥미롭게 다가온다. 여기서 '모서리'라는 말은 여성, 달동네 등 이들이 속한 사회적 공간을 지시하며, 그것이 어딘가 위태로운 주변부에 위치해 있음을 뜻한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그 곳이 매우 날 선 공간이라는 느낌을 주는데, 그런 점에서 이 단어는 그들이 속한 구조 전체를 완전히 새롭게 구성할 만큼 힘이 있는 공간으로서 그 곳을 규정한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멋지긴 해도 100년 전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강령이 떠올라 어딘가 낡은 느낌이 든다. 하지만 거기에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입'이다. 그리고 이 입은 주변부에서 아직 존재가 되지 못한 자들이 가진 유일한 무기이자 매혹의 원천으로서의 신체이다. 이 입은 말하고 떠들고 고함치고 욕하고 비명을 지른다. 또 웅성거리고 우물거리고 조잘거리고 재잘거리고 소곤거리고 수근거리고 쑥덕댄다. 먹고 마시고 삼키고 뱉고 토한다. 빨고 핥고 입 맞추고 깨문다.
_김시습(양주시립미술창작스튜디오 학예연구원)
사진촬영 : 고정균, 김중원
디자인 : 안수인, 장자인
안수인, 장자인 2인전
모서리의 입
2016.4.1 -
4.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