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김유자, 박정연 2인전

​어둠이 오면 내가 찾아가리라

2024.12.4 - 12.22

ORB(김유자·박정연)의 두 번째 기획전 《어둠이 오면 내가 찾아가리라》는 ‘종말’이라는 개념과 오늘날의 관계를 다시 살피며 동시대 존재들이 느끼는 징후적 감각과 모호한 시간성에 집중하는 전시이다. 두 작가는 가장 내밀한 내면부터 타인, 주변 환경, 세상에까지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미묘한 감각을 이야기하다 오늘날 ‘종말적’이라는 감각이 전형적인 개념에서 벗어나 있다는 생각을 공유했다. 이번 전시에서 두 작가는 ‘종말’의 감각을 미래의 사건이자 도래할 끝으로서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게 아닌, 알아챌 수 없는 아주 천천한 걸음으로 이미 우리와 함께 걷고 있는 동작의 감각으로 해석한다. 

시인 T. S. 엘리엇의 시구 ‘세상의 종말은 이렇게 다가온다. 쾅 소리가 아닌 흐느낌으로(This is the way the world ends, not with a bang but a whimper)’ 속 종말의 움직임에서 더 나아가 두 작가는 흐느낌조차 아닌 미세하게 퍼지는 진동으로서 종말, 치명적이지만 동시에 연약한 동작으로 우리를 감싸는 종말적 감각을 풀어내고자 한다. 이는 그 미묘한 진동을 감지하는 형상과 존재들의 상처와 삶, 내일과 어제를 향한 오늘의 감각에 주목하고자 하는 열망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에서 김유자는 사진을 통해 일상에서 쉽게 망각되는 움직임과 존재를 포착하고 개인과 세계에 퍼진 ‘볼 수 없는’ 미약한 떨림이 드러나는 순간들을 바라본다. 박정연은 영상을 통해 신화 속 인물을 주변의 여성 청년들로 치환하고, 도시 속 일상을 내면과 세계가 섞여 있는 시공간으로, 우리가 세계를 어떻게 감내하는가를 드러내는 시공간으로 재전유한다. 전시는 1층과 지하로 이루어진 두 층위의 세계를 구성한다. 먼저 1층에서 일상의 존재와 풍경 속에서 징후적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진동을 증폭시키고자 한다. 이곳에는 8점의 사진으로 구성된 김유자의 <밤 문자 Night Writing> 시리즈 중 7점과 박정연의 <나이트 피스 Night Piece> 작업이 놓여 있다. 


박정연의 <나이트 피스 Night Piece>는 2채널 영상으로 구성된 작업으로 전시의 전반적인 흐름을 예고하는 트레일러 역할을 한다. 작업의 제목인 나이트 피스는 15-16세기 회화에서 유래해 문학으로 전용된 개념으로 낯설고 우연한 사건·사고, 기이함, 환영, 불안, 운명적 순간 등 이성적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내면의 어두운 힘을 밤의 여러 풍경과 연결한 장르를 의미한다. 작업은 나이트 피스의 장르적 개념을 기반으로 침입과 초대, 고립과 연결 등 모순적이라고 느끼는 순간들을 함께 엮어내며 외로운 존재들의 열망과 맞닿는 감각을 그린다. 

 

김유자의 <밤 문자 Night Writing> 시리즈는 전직 군인인 샤를 바비에르가 고안한 열두 개의 점으로 구성된 암호용 문자에서 비롯된 제목이다. 어두운 밤 전장에서 소리 내어 말하지 않고도 정보를 교환할 수 있도록 고안된 언어는 이후 루이 브라유가 재학 중인 맹학교에 소개되고 그는 오늘날의 점자를 창안한다. 작가는 이 이야기 속에서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어둠의 상태를 조우할 때 생겨나는 새로운 언어의 가능성에 주목한다.

 

거대한 불상처럼 윈도우 갤러리에 비치된 사진 <밤 문자>는 손을 사용해 휘파람을 부는 연주 기법(Hand Flute)을 포착한 것이다. 본디 휘파람은 입술만으로 가능한 연주이지만 손의 도움을 받을 때 소리는 더 멀리 닿을 수 있고 음계는 세밀히 조정된다. 김유자는 이러한 소환의 동작으로 어둠에 다가가고자 하는 의지를 드러낸다. 김유자에게 어둠은 사람들을 두렵게 하지만 그로 인해 그들을 모이게 하는 공간이다. 그의 작업은 어둠 안에 숨은 가능성을 향한 믿음이며 동시에 희망과 절망, 평화와 불안이 함께하는 다면적인 세계에 대한 반응이기도 하다.

웹캠으로 촬영된 박정연의 <세멜레의 빛>은 세멜레와 제우스 신화를 변주하여 일상의 이면에 도사리는 중독과 자기학대적 면모, 그러나 세상과 타인을 향한 시선을 거둘 수 없는 인물을 이야기하는 작업이다. 원본 신화에서 제우스의 연인이었던 세멜레 공주는 제우스에게 본래의 모습을 보여달라고 간청하였다가 빛으로 변한 제우스를 보고 타죽게 된다. 그러나 이 작업 속 세멜레를 사로잡는 빛은 매혹적인 유혹이 아닌 미디어를 통해 흘러나오는 눈을 뗄 수 없는 중독적인 아픔, 그녀의 고통이 아니면서도 그녀의 고통인 것이다. 세멜레는 빛에 고통스러워 하지만 절대 눈을 돌리지 않은 인물로서 개인을 취약한 상황으로 몰아넣는 세계와 그럼에도 사라지지 않는 집념을 드러낸다.

<종을 울리고 우리는 걷는다>는 숲길을 걷던 중 하늘을 올려보다 문득 햇빛을 머금은 단풍잎이 밤하늘의 별들 같다고 생각해 촬영한 것인데, 의도치 않게 필름을 태워 나무와 반딧불이 강물에 비치는 듯 기묘한 장면이 되었다. 이전 작 <Cusp>(2021-)에서도 필름의 화학적 작용을 화면 내로 적극적으로 수용한 김유자는 예측 불가능한 변화를 긍정하며 빛과 그림자가 뒤섞인 장면을 한자리에 불러온다.

 

<미노타우루스는 미궁에 떨어진 첫 번째 아이였다>는 기존 미노타우루스 신화에서 영웅적 존재인 테세우스를 도려내고 홀로 미궁 안에서 누군가의 흔적을 찾아보려는 외로운 괴물 미노타우루스의 여정으로 신화를 전유한다. CCTV 카메라의 야간 투시 기능을 통해 촬영된 도시 공간은 개인의 존재적 불안을 가중하는 미궁이자 외부와 내면세계의 풍경이 중첩된 다층적인 장소가 된다. 그곳을 배회하는 인물은 인간의 형상을 한 야생 짐승처럼 포착되며 도시-미궁 속에서 익명화되고 폐쇄적 상태인 개인의 내적 풍경을 드러낸다. 

 

지하 한 켠에는 김유자의 <밤 문자 Night Writing> 작업 중 하나인 <동시에 열려 있는 여러 개의 창>이 자리한다. 1층의 <디디>와 묘한 대비를 이루는 사진은 불에 탄 채로 드러난 구멍을 조명한다. 사진이 가져오는 다양한 상상적 맥락 속에서 김유자는 출구이며 동시에 또 다른 사건의 입구, 끝과 시작이 중첩된 다층적 상황에 집중한다. 작업은 밤의 시간을 그리며 낮을 기억하는 움직임으로 작동한다.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