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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 시작, 가로수의 미래

 

 


 

-인용된 문장들은 모두 홍철기의 작가 노트에서 따 왔으며

이 글은 그 문장들에 대한 부가 해석 같은 것이다.

 

 

홍철기는 찍는다: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으면서 ‘이건 간단한 스케치 내지는 단편적인 기록이야, 나중에 다시 꼭 다른 카메라로 찍으러 와야지.’하고 큰 카메라로 다시 촬영해보기도 했지만,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 내야 한다는 강박 때문인지 현장의 시선들을 의식해서 인지, 처음 찍었던 스마트폰 사진보다 만족스럽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사진을 찍는 일은 맨눈으로 보기-파인더 혹은 액정화면-셔터 누르기-사진 이미지만들기 순서로 진행된다. 우리는 사진을 찍기 전 눈으로 먼저 대상을 본다. 하지만 그건 기록할 수가 없다. 그래서 카메라를 쓴다. 그게 폰카건, 디지털이건, 필카건, 대카건 마찬가지다. 카메라가 기록한 이미지는 어떨까? 대부분은 실망스럽다. 찍기 전에 보았던 이미지는 결코 아니다. 그러나 그 순간은 이미 지나갔고 다시 되풀이 될 수 없으며, 찍힌 이미지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다. 그러므로 사진은 늘 찍는 작가의 입장에서는 기억에 관한, 이미 보았던 이미지에 관한 불충분한 대체물이다. 아니면 불만족스러운 부가물 같은 것이다.

  물론 이게 전부는 아니다. 사진은 찍는 것 뿐 아니라 만드는 것이어서 인화와 현상 과정에서 여러 기교를 부리고, 트리밍하고 컴퓨터로 변화를 준다. 이 과정에서 사진은 눈에 보였던 순간에서 점점 멀어진다. 그렇게 멀어져서 현실로부터, 피사체로부터 독립한다. 드디어 사진은 현실을 바탕으로 한 어떤 다른 이미지가 된다. 그 순간 찍는 이가 가진 최초의 기억은 희미해지고 사라져간다. 결국은 사진 이미지만 남는다. 처음 보았던 순간의 기억은 사진과 비슷해지거나 아득하게 사라져 버린다.

  사진은 그래서 현실을 찍었지만 현실이 아니게 된다. 이미지가 된 사진은 독자적 길을 걷는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늘 그 사이에 서있다. 어정쩡하게 카메라를 들고. 그건 누구도 마찬가지다.

 

홍철기는 말한다.

  ‘그 순간을 조금이라도 부여잡기 위해 카메라를 꺼내서 재빨리 찍지만, 사실 나중에 찍은 사진을 꺼내 보면 대부분 그때의 느낌들은 홀딱 증발해 버린 채로 사진 속 공간 맞은편에서 멍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만지작거리던 내 모습만 떠오른다.’

 

  이 망연자실함이 사진을 하는 사람이 갖는 기이한 운명이다. 자신이 찍은 사진이 결코 눈으로 본 것과 같지 못하리라는 것, 자신은 늘 어떤 이미지들을 그리워하면서 셔터를 누르고, 이미지를 보정하고 프린트 할 것이라는 것. 라깡 식으로 말하면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욕망을 향해 끝없이 미끄러지리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나 사진의 시작은 거기서 부터이다. 사진은 늘 찍는 사람의 욕망을 넘어서 존재한다. 어떻게? 크라카우어를 비롯해 벤야민과 다른 사진 이론가들이 말하듯이 사진의 무의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진의 무의식이라고 말하면 어렵지게 느껴지지만 사실은 간단하다.

  우리가 사진을 찍을 때, 혹은 찍는 순간 눈으로 보는 것은 사진 찍힌 광경의 극히 일부일 뿐이다. 즉 가로수가 있는 장면이라면 그 세세한 디테일을 모두 보거나 풍경 전체를 결코 보지 못한다. 잘해야 어떤 분위기, 느낌을 보거나 보았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리고 사진을 찍는다. 사진은 당연히 그 때의 분위기가 아니며 의도 하지 않은, 의식조차 하지 못한 수많은 것들이 사진 속에 담긴다. 그건 아무리 통제해도 마찬가지이다. 그게 사진의 무의식이며 그 무의식은 우연으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또 그 우연은 모두다 필연이다. 필연은 현실이며 현실은 바로 세계 그 자체이다.

  사실 사진의 무서움은 그 무의식에서 오며, 사진의 가능성과 의미와 즐거움도 거기에 있다. 이곳에서 사진은 회화와, 조각과 갈라서며 고유의 성격을 드러내 보여준다. 물론 이것이 사진이 가지는 독특함, 고약함, 기이함의 전부는 아니다. 하지만 사진을 시작하거나 진지하게 고려한다면 이걸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것은 회화의 붓질, 색깔등이 어떻게 해도 화가의 통제를 벗어나려는 것과 비슷하다. 그걸 제어하려는 화가의 의지와 물감 사이의 긴장이 그림의 목숨인 것처럼, 사진은 사진가의 호흡과 시선이 어찌할 수 없는 세부들과 만나는 데서 온다. 그걸 느끼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시간은 경험이고 경험은 셔터에서 오며, 셔터는 이미지를 만든다.

 

홍철기는 본다

 

‘퀄리티가 좋은 인화물도 아니었지만 사진을 통해서 보여 지는 가로수의 모습은 수 세기를 초월한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사실 가로수도 변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왠지 그 변해버린 풍경 속에, 아니 변해가는 풍경 속에서 가로수는 변화의 모습들을 기억하며 항상 그 자리에 있었던 듯 했고 앞으로도 있을 것만 같았다. 도시개발계획 속 도구 혹은 재료로서의 재단된 보도블럭 같은 느낌과는 다르게 나무껍데기의 거친 질감은 절대적인 시간의 흔적을 가로질러 과거 혹은 미래의 경계에 서 있는 존재로 보였다.’

 

  가로수는 인공자연이다. 관리되는 자연으로서 가로수는 관리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한다. 그것은 나무의 본성이다. 인간들은 그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가로수가 인간의 손과 제어를 벗어나 무성해질 때 가로수는 기이해진다. 생명력, 번식력이 경이와 찬탄과 묘한 공포를 동반한다. 반대로 가로수가 죽어갈 때, 혹은 죽은 가로수, 이식된 가로수, 재개발, 재건축 가운데 살아남은 나무들은 감정이입을 불러온다.

  가로수는 도시가 가진 희미한 자연의 기억이고, 자연은 제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장치이다. 이 장치들이 도시의 어떤 틈이 된다. 화이트 홀처럼 인공이 아닌 세계를 들여다 볼 수 있는 구멍이다. 그 구멍들은 은폐되거나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 어느 순간 홍철기의 경우처럼 눈에 들어온다. 그 순간이 바로 ‘결정적 순간’ 혹은 ‘셔터 찬스’ 일지도 모른다. 브레송과는 다른 의미에서.

  아마도 홍철기가 본 가로수는 그 자신일지도 모른다. 아니어도 상관없다. 사진도 가로수처럼 제어를 벗어나려한다. 가로수의 욕망과 사진의 욕망이 서로 만나면 사진은 읽을거리가 많아진다. 그렇지 않으면 사진은 빈약해진다. 사실 피사체와 현실은 결코 빈약해지지 않는다. 그럴 수가 없다. 단지 사진이 그럴 뿐이고 그림들이 그럴 뿐이다.

  그러므로 사진은 사실 늘 찍는 사람 자신이며, 좀 과장하면 모든 사진은 자화상이다. 빈약하면 빈약한대로 풍성하면 풍성한대로. 그러므로 사진은 최민식 말대로 ‘종이거울’이다. 단 그 거울은 늘 자신을 보여준다. 무엇을 어떻게 찍든 간에.

가로수의 미래, 사진의 미래

 

‘그 공간들 속에서 도심 속 초록처럼 시간의 경계 혹은 관계의 틈을 찾고자 하며, 그것은 나에게 ‘생명력, 쓸쓸한 위로, 아름답고도 절박한 것들, 외로움이나 어떤 침묵들을 확인하며 과거와 현재를 이을 수 있게 도와주는 것 같다.’

 

  가로수에게는 대개 미래가 없어 보인다. 잘려 베어져 사라지거나 잘 해야 이식되는 것. 가로수의 미래는 도시와 거리의 미래이다. 사라지리라는 것- 이건 인간의 미래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무라는 종은 인간이라는 종이 지구생물학적 시간 속에 차지하는 극미한 두께에 비하면 상상할 수 없는 두께와 역사와 미래가 있다.

  사진에는 어떤 미래가 있을까? 당연히 없다. 사진의 시간은 영원한 현재지만 동시에 늘 과거이다. 과거와 현재만 공존하는 사진의 시간은 영원성을 지향하지 않는다. 언제나 찰나일 뿐이다. 그러므로 미래가 없다.

  하지만 사진을 찍는 것은 다르다. 사진 찍는 이는 늘 과거를 찍었으면서도 그것이 과거가 아니길, 영원한 현재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바람은 사진가의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진에 의해 획득된다. 시간이 지나면 지나 갈수록 사진은 본래의 의도와 상관없이 기록으로 변하고, 기록은 영원한 현재가 된다. 그 기이함이 사진의 본질이다. 물론 이는 사진에 따라 다르지만 설사 그것이 가짜 사진, 합성된 사진이나, 몽타쥬라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사진은 맥락이 벗어난 파편이 되어서도 늘 현재가 된다.

 

  홍철기가 사진을 시작했다. 그의 시선은 도시, 가로수, 풍경들을 바라보고 카메라도 그걸 따라간다. 그가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그건 그도 나도 모른다. 하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멈추기 쉽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사진에는 치명적인 뭔가가 있기 때문이다. 건투를 빈다. (영혼 없는 건조한 상투적인 말투로, 왜냐면 결국 자기가 알아서 할 일이기 때문에)

_강홍구(작가)

​디자인 : 강동형

홍철기 개인전

NO MAN'S LAND 맹지

2015.6.19 -

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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