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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살아있는 동안 우리는 늘 이미지를 인식한다. 이 인식은 눈에 보이지만 손으로는 결코 잡을 수 없는 가상의 캔버스를 규칙적으로 저장하는 행위와도 같다. 쌓인 캔버스는 결국 시간의 논리에 의해 가장 오래된 것부터 분쇄되지만, 영상매체술의 발전은 모든 캔버스에 영속성을 부여했다. 어떤 추억을 되뇐다는 것은 이 캔버스를 다시 꺼내 보는 것이다. 과거의 추억은 빛바랜 캔버스가 주는 어떤 풍미, 찢어진 조각이 발생시키는 우연의 미학을 간직했다면, 현재의 추억은 선명한 화질을 통해 정확하고 생생한 정보를 담고 있다. 휴대폰이 대중적으로 보급된 이후 분화된 두 종류의 캔버스는 저마다 다른 위상, 목적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의 공통점을 갖는다. 모두 두께가 없는 캔버스라는 사실.

 

우리는 두께가 없는 캔버스를 상상할 수 없다. 3차원 세계에서 원자가 질량을 갖는다는 사실. 즉 질량이 없는 것은 존재할 수 없다는 거룩한 진리. 결국, 두께가 없는 캔버스는 오로지 모니터 속 가상공간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이 공간은 평면의 질서를 전제로 하는데, 이 순수한 평면은, 시각화 과정에서 발생하는 불가피한 눈속임을 굳이 우리에게 밝히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이 가상의 캔버스를 볼 때, 그것이 두께가 없다는 사실을 결코 인지하지 못한다. 그것을 확인할 방법이 없다고 우리를 좌절시키는 것과 확인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사고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에는 분명 차이가 있다.  

 

정리하면, 이 속임수는 매스에 대한 기만이다. 존재하는 것 중 두께가 없는 것은 없다는 진리를 가린 채, 모든 물질을 평면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방식. 이미지 캡처에 더욱 순응하게 되는 자세, 이것은 우리에게 분명히 존재하는 표지판의 옆면을 보지 못하게 만들고 정보 이외의 것들을 전부 증발시켜버린다. 우리는 이 인식법에 너무 익숙해져 버렸다. 그렇다면 매스를 인식하는 조금 다른 방식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2.

여기 MRI 이미지와 건축물의 섹션 이미지가 있다. 두 이미지의 공통점은 대상의 단면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 잘린 대상이 무엇인지 손쉽게 알 수 있지만, 잘린 부위를 제대로 파악할 수는 없다는 점. 이를테면 인간의 특정 부위를 크롭한 MRI 이미지를 볼 때, 우리는 그것이 신체의 어느 곳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으며 마찬가지로 건축물의 특정 단면도를 본다 한들 그것이 이 건물의 어느 부분에 해당하는 것인지 단번에 짐작하기 어렵다. 

 

물론 의사와 건축가는 자신들이 자른 대상, 즉 인체와 건축물에 대한 기본적인 구조를 사전에 통달하고 있으므로 주어진 단면을 쉽게 읽을 수 있다고 반론할 수 있다. 이 타당한 반론을 통해 유추할 수 있는 점은, 이들이 훈련을 통해 이미지를 읽을 수 있게 됐다는 점이다. 결국, 누구나 연습한다면 이 단면 이미지를 읽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나에게 한 가지 시사점을 제공한다. 훈련을 통해 새로운 방식의 이미지 독해가 가능해진다는 사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단면 이미지가 먼저 주어지고 그 대상의 원형을 유추하는 능력이 아니라, 반대로 멀쩡한 대상을 잘라 단면을 상상하는 능력이다. 건축물 안에서 자신이 속한 건물의 단면을 자유자재로 그려낼 수 있는 건축가, 인체를 보고 그것의 여러 단면을 상상할 수 있는 의사. 가시적으로 존재하는 것들은 언제나 입방체로 환원될 수 있기에, 대상에 대한 외형적 정보를 사전에 파악하는 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점은 ‘이 단면을 얼마나 잘 활용하는가’이다.   

 

대상의 단면을 상상하는 일은 꽤 즐겁다. 간단한 사물의 단면을 상상하는 것에서 조금 더 복잡한 공간을 자르는 것까지, 다양한 예제 연습을 통해 절단 상상력을 연마할 수 있다. 그런데, 자르는 대상의 복잡한 외형과는 별개로 잘린 면이 평평한 면이 아닐 때 이 상상은 더 이상 즐겁지 않다. 즉 절단 축이 곡선이 될 때 결과물을 유추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된다. 또한, 그 곡선이 하나의 대상을 반복 교차할 때, 하나의 대상을 곡선 축으로 여러 번 잘라낼 때, 그 대상의 모습을 단계적으로 상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이를테면 머릿속에서 사과 한 개를 곡도로 자른다고 가정해보자. 잘린 면을 제외한 다른 부분을 또 한 번 부드럽게 잘라낸다. 이런 식으로 외피를 전부 걷어내고 사방이 단면으로만 구성된 사과를 상상할 때, 당신은 단계별로 복잡해지는 내부의 구부러진 단면을 정확하게 순서대로 이미징할 수 있겠는가. 곡률은 차치하더라도, 자르는 대상이 사과처럼 단순한 것이 아닌 애초에 복잡한 형태의 사물이거나, 내부를 전혀 알 수 없는 것이라면 상상은 더욱 어려워진다. 물론 앞서 언급한 것처럼 나는 이런 부차적인 요인들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복잡한 곡률의 절단면을 상상하는 것은 여전히 어렵다. 무언가 다른 분야에서 단서를 찾을 필요가 있어 보인다. 

3.

18세기 서양의 세이버 검술(saber exercise)에서 공격과 공격 사이를 연결해주는 동작이 있다. 베기 위주의 공격법에서 검투사는 칼을 휘두를 때 발생하는 취약점, 공격과 공격 사이의 비어있는 시간을 보완하기 위해 ‘물리네(moulinet)’라는 기술을 사용한다. 즉 물리네는 칼을 한 번 휘두른 직후 회전시켜서 다음 휘두름까지 빠르게 연결하는 동작을 말한다.

 

물리네는 베기와 베기 사이를 연결하면서 칼의 속도를 가중하는 장치이다. 칼의 위력은 행위자의 신체적 역량과 큰 관련이 없다. 그것은 칼의 속도와 비례한다. 하지만 이러한 효율성 뒤에 가려진 물리네의 다양한 기능들이 있다. 이를테면 물리네는 공격과 공격 사이를 보완해주는 보조적인 수단이자 동시에 하나의 독립적인 공격이다. 이것은 자신의 앞에 있는 대상을 베기 위한 전술이라기보단 자신의 근거리 혹은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에 있는 대상의 습격을 차단하고 그들을 공격하는, 즉 자신이 속한 공간을 자르는 전술이다. 

 

신체의 동역학과 세이버의 중량 모멘텀이 과학적으로 결합된 이 전술은 행위자의 전진을 가능케 한다. 중간 동작 없이 칼을 연속적으로 베면서 전진을 하는 것은 매우 비효율적이고 어렵다. 또한 물리네는 전진과 동시에 부드러운 정지를 가능하게 해주는 장치이기도 하다. 관성을 줄여주는 이 동작은 검투사의 위엄, 부드러운 정지를 돋보이게 해준다. 즉 물리네는 행위자의 기동성에 관여한다.    

 

이 회전운동은 다양하게 심화될 수 있다. 행위자의 무기가 세이버가 아닌 쿠크리, 혹은 더욱 복잡한 형태, 이를테면 그물 형태의 광선 검이라고 했을 때 공격의 양상은 더욱 첨예해진다. 대상을 예측할 수 없는 형태로 잘라내는 공격. 부드러운 춤을 연상시키는 이 방식은 굉장히 섬세하지만 동시에 터프하다. 

 

누군가 그림자가 없는 검을 소환해 휘두르는 장면을 상상해본다. 멀리서 볼 땐, 마치 아름다운 춤을 추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자세히 보려고 가까이 다가가는 순간 나는 잘게 분해된다. 

4.

전시장에는 발견된 징후들이 놓여있다. 캔버스에 그려진 정물들은 서서히 바닥으로 떨어지며 조각들은 스스로 껍질을 벗은 채 속살을 드러내고 눕기 시작한다. 어떤 캔버스는 자신의 몸을 틀어 옆면을 부각하기도 하며 몇몇 조각들은 산발적으로 공격당한 자신의 내부를 여과 없이 노출한다. 이런 징후들은 생각보다 날 것의 형태로 그 자체만으로 모종의 힘을 갖는다.  

 

이후 징후를 적극적으로 분석하고 수용하는 나의 프랙티스가 이어진다. 사물을 잘라내 의도적으로 단면을 드러내는 방식은 정다면체를 이용한 실험으로 연결된다. 계획되지 않은 손길로 해체된 도형은 그것의 원래 속성에서 벗어나며 일종의 예측 불가능성을 획득한다. 이 프랙티스는 ‘자르는 것’과 ‘휘두르는 것’으로 분화된다. 그리고 각각의 작동 법칙에 따라 심화되며 결국 하나의 총체적 결과물로 귀결된다. 이제 ‘훈련 가능한 인식능력’은 예측 불가능성을 탑재한 하나의 조각을 탄생시킨다. 이 조각은 쉽사리 파악될 수 없다. 

 

결국, 두께를 설명하지 못했던 과거의 인식법은 무너지고 훈련 가능한 새로운 인식법이 제시된다. 일련의 결과물을 통해 얻은 새로운 혼란, 예측불가능성은 또 하나의 징후를 생산한다. 진정한 형체를 예측할 수 없는, 고정될 수 없는 매스, 그것은 조각의 역할을 변화시킨다. 그림과 사진으로는 담을 수 없는 존재. 그것을 담는 그릇. 그것이 바로 조각에 주어진 역할이다.

​_최하늘

디자인 : 신신

전시 촬영 : 홍철기

후원 및 주최 : 서울시립미술관

* 이 전시는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시행중인 '신진미술인 전시지원 프로그램'의 선정 전시입니다.

최하늘 개인전

No Shadow Saber

​기획 : 최하늘

2017.7.7 -

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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