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리나 개인전
얕고 깊은 방백
2024.11.2 - 11.29
얕은 시간과 깊은 기억의 사이에서, 김리나 《얕고 깊은 방백》
박주원 (독립 큐레이터)
시간은 앞으로 흐른다. 앞으로 흐르는 시간을 붙잡을 수 있을까? 뒤로 남겨진, 이미 번져버린 방금 전의 기억 앞에서, 되돌릴 수 없는 어떤 순간 앞에서, 우리는 흐르는 시간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앞에 무엇이 올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모든 것은 기쁨과 후회로 스며들기에, 단지 느낌과 기억으로 밖에 남아있지 않게 되기에.
김리나는 이번 《얕고 깊은 방백》 전시에서 영화적 감각을 회화로 끌고 오며 ‘회화 시네마(painting cinema)’라는 전제를 붙이고, 시간의 흐름을 작품에 나타낸다. 영화와 시간은 공통적으로 앞으로 흐르고, 그것을 겪는 사람과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 한번 돌아가기 시작하면 시작된 이야기를 편집할 수 없다는 점에서 자유롭지 않지만, 그것을 겪는 사람과 바라보는 사람은 지나간 것을 추억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입장에 따라 알맞게 편집해서 기억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또 공통점이 있다. 그래서 얕은 표피와 같은 영화와 시간의 흐름은 피부 깊숙한 곳에 각각의 깊은 기억으로 스며들어 저장된다.
김리나의 이번 전시는 자신이 자주 다니는 강북의 모습들을 바라보며 근 1년 동안 찍은 사진에서 출발한다. 강북의 다양한 공간들을 걸으며 작가가 바라본 세상은 쉼 없이 움직인다. 작가가 아날로그 무비카메라로 찍은 사진들을 바라보니 참 열심히 돌아다녔구나 싶다. 작가가 발걸음을 옮기며 정직하게 담아낸 약 1년의 시간은 고스란히 그림으로 옮겨져 작가가 치열하게 고민했을 시간과 순간들을 보여준다. 영화를 좋아하는 작가가 회화와 시네마를 연결 짓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플레이 버튼을 누르면 가차 없이 시작되는 영화처럼, 전시가 시작되면 바로 관객을 맞이하게 되는 전시의 특성상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이걸 어떻게 연결해야 할지, 어느 지점까지를 그리며 한 편의 웰메이드 영화를 만들어야 할지 작가는 고민했을 것이다. 오랜 기간 준비한 첫 개인전인 이번 전시에 나온 작품들은 작가가 고민한 그 여정과 시간들을 모두 깊게 담아내고 있다.
김리나는 이번 전시에서 이처럼 겨울, 봄, 여름, 가을의 감각이 담긴 평면의 시네마를 선보이며 계절의 온도가 담긴 작품들을 보여준다. 합정지구 1층의 작품들에서는 빛을 이용하며 시시각각 변화하는 장면들을 느낄 수 있게 한다. 작가는 표면에 스민 물감들이 시간과 빛의 흐름에 따라 다른 감정들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점을 생각하며 외부에서도 작품을 관람할 수 있도록 설정하였다. 긴 시간 속 편집된 화면과 인물들이 필름에 가로로 펼쳐진다. 작품을 따라 걸으며 몰입하게 되는 장면에는 누군가의 모습을 통해 느끼는 나의 기억이 존재한다. 주어를 알 수 없는, 대체가능한 평범한 사람들의 뒷모습에서 바라보는 사람은 자신의 깊은 기억을 꺼내어 보며 작품에 몰입하게 된다. 그리고 계단을 통해 마주하는 지하에는 회화 상영관이 펼쳐진다. 1층에서 사용된 작품을 비추는 자연광은 지하에서는 조명 빛으로 대체된다. 작품은 영사막이 되며, 관람객들은 조명의 빛을 통해 상영되는 회화 스크린을 보게 된다. 또한 지하의 다른 작품은 영사기에서 돌아가는 필름의 모습을 하고 있다. 1층에 전시되는 작품에서 사용된, 아날로그 무비 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소재로 하며 김리나가 니들로 긁거나 유화를 사용하여 그림자를 만든 필름이 영사기에서 찰칵찰칵 소리를 내며 돌아간다. 이러한 지하의 작품들은 관람객에게 지나간 추억과 시간을 상기시키며 1층의 작품에서 느낀 것과는 또 다른, 그림자처럼 박혀버린 피부 깊숙한 곳의 감각들을 오롯이 혼자 느낄 수 있는 몰입의 지점을 가져온다.
합정지구 1층과 지하에서 보이는 각각의 장면은 김리나의 관객을 향한 방백이다. 그림 속에 등장하는 등장인물들은 듣지 못하는, 작가가 그림을 바라보는 사람에게 전하는 작가만의 아득한 대사들이다. 김리나가 생각한 작은 따옴표 안에 갇히는 이야기들, 입안에 맴돌지만 섣불리 말하지 못하는 감정들, 원하는 순간에 스며들지 않고 조금은 어쩔 수 없이 남겨진 기억들이 뻑뻑해 보이는 붓 터치의 흔적들에 담긴다.
방백은 듣는 사람에게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김리나는 방백을 유동적인 회화로 읊조리며 관람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당신의 얕은 시간의 흐름 속에 깊이 남아버린 기억과 감각은 무엇인가? 당신의 영화는 어떤 장면들로 이루어지는가? 작가의 전시를 통해 각자 잠시 잊고 있었던 삶의 흔적들을 되짚어 보며 자전적인 이야기들을 상영해보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