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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가 사람을 무는 것이 '사고'이고 사람이 개를 무는 것이 '사건'이라는 문구가 들어간 문장을 읽은 적이 있다. 이 문구가 오래 남았던 것은 사람이 개를 물어서 '사건'이 되었음을 감지했기 때문이리라. 그러니 그것은 사람이 개를 물었다는 이상적인 인간에 의한 사태에 관한 것이지, 개가 상처를 입었다는 폭력성 내지 잔인함에 근거한 문장은 아니다. 예컨대, 개가 어떤 폭력을 경험하더라도 인간은 그 일을 '사건' 으로 여기지 않을 것이다. 사건으로 여겼다면 닭이 형광등 밑에서 부지런히 알을 낳는 일이나 소가 한평생을 비좁은 쇠창살 속에 갇혀 죽음을 기다리는 일은 점점 더 열악한 환경으로 가중되지 않았을 것이다. 도대체 왜 강간에 의해 번식해야 하는 생명체가 있는 것인지, 수천만 마리의 돼지가 흙바닥에 생매장되어야 했는지에 관해선 대부분이 물음도 없이, 더 나아가 인식도 없이 그저 '이해한다. 이렇게 죄악이란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반복해왔고 반복해갈 참담한 일상이 평범한 일상과 같은 하늘 아래 공존한단 사실. 합정지구에서 열린 기획전 《짐승에 이르기를》은 그 간극을 놓지 못해 시작된 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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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숙하고도 먼 단어 공생에서 시작하려 한다. 인류는 태초부터 동물을 키우고 작물을 수확하며 살았으니, 인간에게 가장 익숙한' 공생은 반려생활일 것이다. 반려동물을 떠나보 내야 하는 순간을 떨리는 마음으로 감내해야 하는 일상이나 반려식물을 지키기 위해 다른 존재를 희생시키는 일상만 떠올리더라도 '공생'은 의미만큼 아름답기 어려운 말이다. 사랑을 머금은 자리엔 언제나 슬픔과 고통이 조금씩 어려있다. 

  전시장의 두 층을 잇대어 공생을 살펴보려 한다. 각 층에 따르면 공생이라는 건 이런 식이다. 우선, 1층. 인간은 반려존재 와 뜻대로 공생하지 못한 아픈 기억 때문에 시간이 흐를수록 절망하고 소리없이 운다. 함께 살던 강아지 밤세가 죽고 난 후로, 이상징후를 보이는 도도를 위해 권동현+권세정은 남성의 외형을 하고 있는 반려동물 케어로봇 세디(Seddy)를 제작한다. 도도와 세디의 시점에서 촬영한 다큐멘터리 영상작업 <세디: 도도와 만나는 방법>은 나이가 들어 보행이 불편한 도도와 CCTV 로봇 세디 간의 좌충우돌 생활기가 나온다. 노견만큼이나 느리게 덜컹이는 세디에게 다가가 얼굴에 묻은 간식을 핥으며 미약한 훼손을 시도하는 장면이나, 세디를 제작하기위해 두 눈을 뚫고 나온 드릴은 오히려 역전하려는 관계를 연상시킨다. 

  4미터 높이의 드로잉 <나는 지금 달팽이를 죽이러 간다>에는 김송희가 배추농사를 짓는 한 해 동안 달팽이와 벌인 지난한 투쟁이 담겨있다. 식물들 사이에 숨은 다양한 곤충들 중 작가의 두 손엔 달팽이들이 꼬옥 안겨있는데, 여성의 두 눈에선 살생을 마주한 작가의 곤란함이 잘 드러나 있다. 이전부터 반려견을 떠나보내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울 때마다 김송희는 호두와의 일상을 하나둘 기록해왔다. 호두와의 일상은 드로잉, 일기, 더미북의 형식으로 어느덧 서류함을 가득 채울 만큼 차올랐다.

 

권동현+권세정 작가는 루드, 솜똥이를 키우는 과정에서 나온 소소한 부산물(집을 청소한 젤리 클리너, 세탁 후 건조하다 나온 단추모양의 털 뭉치, 비닐 강아지)을 수집하고 이를 한곳에 모은 후에 작업실에 남은 목재 파편을 덧대어 조각기록을 완성한다(<개집>, 2021). 

  강기석의 <꼭 움켜쥐다 스르르 놓았다>는 반려동물을' 돌봐주다'라는 서술어에서 출발한 영상이다. 돌봄의 대상인 얼음을 (1) 보호하는 퍼포먼스와 (2) 놀이하는 퍼포먼스를 교차편집하여 좋은 상태가 얼음이 형태를 잃지 않게 빛을 가려보려 애쓰는 과정인지, 얼음과 함께 녹아내리고 쪼개지며 순간을 향유하는 과정인지 되묻고 있다. 이는 대상에게 관심을 주고 살피어 좋은 상태를 만들고 유지한다는 '돌봐주다'란 서술어의 의미가 권력자의 입장에서 사유한 것이 아닌지를 의문을 제기한다. 세 작가/팀은 언젠가 지금 이 순간을 후회하며 울겠구나 하면서도, 반려존재와 공생하는 오늘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도리 없이 예술과 현생을 살아간다. 

  다음으로 2층. 앞서 지상에서 반려생활에 수반되는 행복의 변수와 고통의 스펙트럼을 다뤘다면, 지하는 동물을 수단화하며 추구하는 욕망의 변수와 구조적 착취의 스펙트럼을 이야기한다. 무니페리가 실종한 동물을 잊지 못해 데드 에니멀 커뮤니케이터에게 찾아가는 인간의 욕망을 다큐멘터리 영상으로 환기한다면(<실종: 유령으로도 돌아오지 못하고(트레일러)>) 실코와 린드그렌 존슨이 무니페리를 위해 쓴 「인간의 재중심화 텍스트는 무니페리의 3D 애니메이션과 함께 편견적 사고를 옹호하지 않기 위해서는 "윤리적 질서 속에 우리의 위치를 재조정해야 할 필요성을 거듭 강조한다. 

  마지막으로 무진형제는 소설 해저 2만리와 롯데타워의 아쿠아리움을 연결짓는데, 소설의 주인공도 아쿠아리움의 직원도 분류를 기반으로 안정적인 구조를 만들어 관리한다. 작가는 바다에서부터 천공에 이르기까지 가득 메운 인간의 욕망을 시각화하기 위해 80여 점의 필름 조각에 아쿠아리움과 천공의 이미지를 중첩시킨다(<궤적-목하, 세계진문>, 2018). 영상 곁에는 잠수함을 닮은 롯데타워의 형상이나, 분류를 통해 대상을 규정하고 안전하게 관리하는 체계를 시각화한 드로잉 오브제(<궤적-목하, 세계진문을 위한 오브제 1, 2, 3>, 2018)를 병치하여 인간이 외면한 치명적인 진실에 다가서도록 한다. 분류체계를 껴안은 바다와 욕망을 삼킨 하늘은 인간에게 묻는다. '이것은 비단 비인간에게 맞닿아 있는 문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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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해야 한다. 정상적인 인간들로 가득 찬 평온한 거리가 인간을 착취하고 비인간을 말살하는 현시대를 도래하게 했음을 말이다. 국밥을 먹으며 피를 토하는 동물의 눈을 떠올리긴 어려울지라도 이 평온한 거리 만큼은 낯설어야 한다. 고요한 피비린내가 인간과 비인간을 무작위로 덮어가는데 그것을 사건이 아닌 일상으로 여길 수 있으니 말이다. 수천 년간 견고히 해온 기존의 세계와 단절선을 그을 방법을 한강의 소설에서 발견한다. “나는 이제 동물이 아니야, 언니” 그녀는 기억할 수 없는 어린 시절부터 시작된 길들임에 견뎌온 인간을 동물로 상기한다. 현세계가 선사한 두 눈을 찔러서라도 설령 눈 먼 짐승이 될지라도 피끓는 자신으로 이 세상을 살아보려는 시도. 짐승에 이른다면 예외 없이 지독한 공생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진행 : 권동현 권세정 박은정 전그륜

공간 : 권동현

도움 : 이제

디지인 : 이산도

협력 : 개와 고양이의 정원

​후원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21.5.15 -

6.3

짐승에 이르기를

​기획 : 정희영

​참여작가 : 강기석, 김송희, 권동현+권세정, 무니페리,무진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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