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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름하고 가파른 세상을 향한 기념비

 

 

  권동현의 작업은 건축적 요소에서부터 출발한다. 건축적이란 형상이 기둥, 벽, 바닥 등 공간적인 구조체를 바탕으로 이뤄짐을 의미한다. 이번 개인전에서 선보이는 브론즈 조각 ‘이름없는 양식­기념비 모형’ 시리즈는 계단을 기둥과 같이 두고, 벽과 바닥을 더해 수직적으로 구축한 건축물과 같다. 건축은 단순히 물리적인 요소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건축 공간에 담긴 사건, 기능, 행동 등 인간의 활동이 가능한 유기체로 공간이 작동했을 때 우리는 구조물을 건축물이라 부를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권동현의 작업은 분명 건축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으나 사실 거주가 불가능한 형태이다. 계단과 벽이 전체적인 구성의 중심을 이루고 있어 오히려 지나가는 통로, 막다른 골목, 장소 아닌 장소의 비장소성이 강조된다. 그렇다면 그의 작품은 비장소적 요소들을 공간적으로 구축한 ‘건축적 기념비’라 할 수 있는가? 그의 조각을 둘러싼 의구심은 조각의 시작점인 바닥 면에서부터 차분히 시선을 따르다 보면 실마리에 접근할 수 있다.

 

  세 점의 브론즈 조각을 살펴보면, 각기 터로부터 올라온 ‘기단’, ‘계단’을 기본으로 하여 몸체가 형성된다. 기하학적인 통일감 보다는 그 형상이 층층이 제 각기인 비정형성이 돋보이는 구조이다. 이러한 조형적인 특징에는 권동현이 시선을 둔 사사로운 건축적 풍경이 자연스럽게 녹아 들어간다. 작가는 터에 건축물을 마련하듯, 거리를 거닐 계단을 놓듯, 건물 사이사이의 공간인 ‘단(壇)’의 형식을 조각의 구조로 끌어 들인다. 이러한 비정형적인 ‘단’의 형태는 비좁은 골목길에 지어진 건물, 언덕길에 빼곡한 80년대 주택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양식이다. 권동현의 이번 작업은 허름한 삶의 장소에서부터 시작된 것이자 2013년에 선보인 개인전 ‘이름없는 양식’의 연장선상에서 탐구된 결과물이다. 당시의 개인전에서 그는 자신이 유년기부터 살아온 아현동 재개발지역에 대한 장소성을 조각, 설치, 사진 등 여러 매체로 탐색했다. 사람들이 모두 떠나 폐허로 남은 삶의 공간에서 채집한 오브제들로 보호 표식을 만들고, 위장무늬 그래피티로 철거 표식을 가리며 파괴된 삶에 대한 분노, 절망, 저항의 목소리를 드러내기도 했다. 또 다른 작품 ‘모각­이미 있는 조각 작품을 보고 그대로 본떠 새김’ 시리즈는 낡은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비정형적인 계단, 벽, 기단 등의 형태를 시멘트로 본뜨듯 재현한 것이다. 시멘트의 물성은 공간의 비정형적인 요소들을 있는 모습 그대로 담담히 드러낸다. 이후 3년 만의 개인전인 이번 전시는 당시 작업 중 시멘트 모각 시리즈의 ‘조각적 가능성’을 중점적으로 탐구한 결과라 할 수 있다. 건축, 조각, 기념비 사이를 조각적 형태로 되짚으며, 작가는 예술가로서 자신의 뿌리이기도 했던 조각가로서의 ‘열정’을 도리어 묵묵히 되찾아 나간다.

 

  “스스로를 조각가로 규정하는 것은 아니며, 조각의 복권을 원하는 것도 아니다. 어떤 요소들을 볼 때 자연스럽게 조각처럼 다가오는 순간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대학 때 전공이어서 그렇게 됐겠지만... 어쩌면 조각을 모르는 것에서 시작된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다른 탈출구를 찾지 못해 과거로 돌아가는 것은 아닐까?” (작가 인터뷰 中)

 

  마치 그는 ‘오늘날 조각이란 무엇인가?’라는 외로운 싸움 속으로 스스로를 내던진 듯하다. 현재의 조각은 전통적인 조각의 영역을 탈피하기 위한 열띤 미술사적 토론을 거쳐 설치, 영상 설치, 대지미술 그리고 건축까지 다양한 범주로 확대되어 왔다. 이러한 확장이 당연하게 조각의 새로운 지평으로 인식되어 온 현시점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추상, 구상의 형식으로 분투해온 회화와 비교해 볼 때 조각의 전통적 형식은 과거의 잔재로만 남은 게 사실이다. 형식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물성의 측면에서는 더하다. 젊은 작가들의 조각에서는 전통적인 조각의 재료인 돌, 흙, 나무, 브론즈, 석고 등을 찾아보기 더욱이 쉽지 않다. 오늘날 조각의 물성이란 산업시대의 산물인 플라스틱, 합성수지, 발견된 오브제 등이 대체해 오고 있으며, 재료의 범주 또한 급변하는 시대적 흐름에 민감하게 변화해 나간다. 소위 말하는 조각의 동시대성은 권동현의 이전 작업에서 거리낌 없이 탐색되어 왔으나, 이번의 전시에서는 작가의 말처럼 정말로 조각적 ‘퇴행’인지, 필자의 시점처럼 조각을 향한 ‘열정’인지 가장 아카데믹한 형태인 브론즈 조각으로 돌아간다. 작가는 브론즈 작업을 하기 위해, 유토를 손으로 조몰락거려 형상을 빚어내고, 석고 모형을 뜬 다음, 브론즈 캐스팅을 위한 모형 틀을 제작하는 등 다소 번거로울 수 있는 일련의 제작 과정을 거친다. 이 일련의 과정에는 작가의 조각성에 대한 근원적 탐구가 열정적으로 진행된다. 예술의 시작이자 근본적 시각 언어인 ‘손’의 감각이 모든 과정에 철저히 담기기 때문이다. 이는 작가의 작업실이 있는 노량진의 오래된 골목길에서 자연스레 시선에 포착된 풍경들이 손으로 빚어지고, 매만져지어 하나의 단단한 구축체로 변모된 과정이다. 그리하여 건축가 없는 건물의 풍경, 이름 붙일 수 없는 형식, 칸마다 다른 계단의 폭과 넓이, 살면서 자연스럽게 덧붙여진 못생긴 입방체, 모서리의 불규칙적인 더해짐, 세월의 풍파 속에서 더 완만해진 곡면의 형태 등 희미한 시각적 요소들이 우리 앞에 완고한 기념비적 형상으로 또렷하게 드러난다. 조각 작품과 더불어, 시선이 머무른 장면을 그린 연필 드로잉에는 모서리 공간을 쓰다듬는 온기 있는 필치와 섬세한 감수성이 담겨, 허약한 풍경을 향한 시각적 소통에 깊이를 더한다.

 

  “미술 작가로서 혹시 이 시대의 시각적 감각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고민했다. 미술이 세계를 이루고 있는 시각적 요소에 대한 영향력을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 이 부분을 다시 다뤄보고 싶었다.” (작가 인터뷰 中)

 

  예술가의 사회적 역할은 개념적 선언이나 비판의 어조, 행동, 지침만이 전부는 아니다. 눈에 잘 드러나지 않는 역할 중 하나인 ‘시각성의 현현’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권동현의 작업은 시대를 살아가는 예술가로서의 정체성, 시각언어의 생산자로서 예술가의 역할은 무엇인가에서부터 성찰된다. 지극히 하찮은 풍경들, 현재도 끊임없이 파괴되는 낡은 풍경들에 대한 그의 시선은 우리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소소한 시각적 요소를 작은 브론즈 조각이자 작은 건축적 기념비로 재탄생시킨다. 나선형의 구조체는 바닥, 지지체, 벽으로 공간을 보듬어 ‘건축적’이며, 시선의 감각은 손의 공정을 통해 조형화되기에 ‘조각적’이며, 이러한 조형 요소들이 한데 모여 방치되어 온 공동의 서사, 시대적 의식을 담아내기에 ‘기념비적’이다. 작가는 건축적, 조각적, 기념비적 요소의 상호간 합의로부터, 골목의 이름 없는 양식을 단단한 황금색의 ‘건축적 기념비 조각’으로 재탄생시킨다. 그의 기념비 조각이 더욱이 의미가 있는 것은 우리 삶 속에서 소외된 풍경의 서사가 미적 요소로 발현되어, 잊었던 조각의 가치를 다시 들여다보게 하기 때문이다. 권동현의 작업은 세상의 풍경을 한 바퀴 돌 듯 나선형 기념비 구석구석으로 관객의 시선을 역동적으로 이끌다가도, 모난 모서리들에 담긴 소외된 삶의 정서를 차분히 응시해 보인다. 울퉁불퉁하고 삐뚤 빼뚤한 모서리 공간에는 소소한 삶에 담긴 절망, 희망, 낭만, 수수함이 새겨지고, 불규칙한 직각 면의 구성에서는 절벽, 낭떠러지와 같은 아슬아슬함이 세기의 가파른 곶(岬)을 목도하게 한다. 이 허름하고 가파른 세계의 구석구석에 바치는 그의 조각이야말로, 망각된 가치들을 회복하고자 하는 진정한 ‘기념비’가 아닐까.

_심소미 (독립 큐레이터)

촬영 : 김중원

디자인 : 톱니귀

2016.3.4 -

3.24

권동현 개인전

가까이 서서 무심히 바라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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