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묵하는 그림, 정직한 절망의 노래
돌이켜 보면, 모든 죽음 앞에서는 침묵했지만 죽어가는 사람과 마주할 때는 암묵하고 있었다. 침묵이 차후에 발생할 일을 대비하게 한다면, 암묵은 도저히 손쓸 수 없는 일을 포기하는 순간에 일어난다. 암묵의 시간은 그것이 이별이든 죽음이든 간에 무엇인가의 끝을 분명히 예감하면서도 짐짓 넘기는 순간이다. 그러나 우리가 암묵하는 일들은 대체로 삶에 너무 밀착해 있어서, 포기하지 않고는 삶을 지속하기 힘든 것들인 경우가 많다. 예컨대 늙고, 병들고, 사랑하는 것이 그런 종류의 일들일 것이다. 결국 이들이 삶과 분리되지 못한다면, 그것의 의미를 고찰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삶을 조금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삶과 그림의 간격이 좁은 화가들은 그림을 그리면서 그 과정을 이어 가는데, 최민화 역시 그럴 것이다. 최민화의 부랑, 환멸, 싸움, 청춘, 체념, 병에 대해 난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림 앞에서 암묵했다. 그들이 막연한 희망이 아니라 정직한 절망을 노래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자살하는 7백만 가지 방법을 고민하는 걸까, 한 남자가 눅눅해 보이는 바닥에 주저앉아 허공을 응시한다.「7백만 가지의 죽는 방법」 녹슨 쇳빛을 띠는 배경은 인물을 표현한 색채와 거의 구분되지 않아 윤곽선을 제거한다면 남자는 이내 배경에 섞여 사라질 것만 같다. 이 불길한 모호함이 자살을 암시하는 제목과 만나자 그림이 더욱 직설하듯 보인다. 그러나 작가에게 작명 의도를 듣지 않았더라면 하마터면 이 슬픔은 남자 혼자의 것으로만 남을 뻔했다. 작가가 말하기를, '7백만'이 의미하는 바는 한 사람이 죽을 수 있는 경우의 수가 아니라 그만큼의 사망자였다고, 죽은 한 사람을 그렸지만 그 죽음은 7백만 개의 사인 가운데 하나의 사례일 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말은 어쩐지 거짓처럼 느껴진다. 만약 작가가 죽음 자체를 그리고자 했다면 오로지 한 사람을 그리고 699만 명의 죽음을 유추하도록 방치하진 않았을 거다. 저마다 죽게 된 방법이 7백만 가지라면, 그래서 7백만 가지의 죽음을 보여 주고 싶었다면, 그는 아마 이 그림을 시리즈로 7백만 점 그렸을 거다(최민화라면 가능하다). 만연한 죽음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기보다는 외려 하나의 죽음을 일반적인 현상으로 인정하면서 슬픔을 희석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마찬가지로 이 그림이 누군가에게 슬프게 다가온다면 그건 아마 많은 사람이 죽는 사건을 연상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중 특정한 한 사람의 죽음을 회상했기 때문이겠다). 의연하고 싶었던 작가의 바람은 결국 바이없이 실패하는 위로를 향한다. 죽는 사람은 언제나 단독적인 이유에 죽고, 슬픔에 빠진 사람은 늘 철저하게 혼자서 슬프므로.
다시 최민화의 그림을 세 가지 각도에서 살펴보자. 배경, 곧잘 생략된다. 인물, 적극적이건 소극적이건 무언가를 행한다. 사건, 물러나 있다. 종합해 보면 잠정적으로 어떠한 사건이 내막에 있을 것이고 그에 반응하는 인물만 강조되어 있다. 담배 피며 기타 치고「하얀 기타」, 소주 병나발 불고「개같은 내인생」, 게워 내고「서울역」, 혐오감에 휩싸여 이를 바득바득 간다「부패」. 생략된 배경이 현실과의 괴리감을 야기하는가? 아니다. 도리어 부각된 인물의 행동이 그 원인을 찾아 현실 상황을 불러낸다. 심지어 이번 전시 제목과 동명의 그림인 「두 개의 무덤과 스무 개의 나」에서는 스무 명의 최민화가 동시다발적으로 째려보-/포옹하-/눕-/오줌싸-/배회하-/바이올린 켜-/웃-/노래하-는 기이한 장관이 약 4m 길이로 악보처럼 펼쳐진다. 이들은 최민화였을까, 혹은 최민화이고 싶은 최민화였을까. 같으면서도 다른, 반복하면서 변주하는 최민화들은 그를 이렇게 만든 현실 상황을 유추케 한다. 그 현실이란 아마도 이 그림을 그린 1999년까지의 최민화를 이뤄 온 모든 세계였을 테니 그 삶이 얼마나 지리멸렬했을지 짐작도 힘들다. 그림의 가장 전면에 배치된 두 개의 무덤은 이 그림에서 유일한 배경적 요소인데, 최민화 스스로 그가 서 있는 곳을 재확인하는 대상이기도 하다. 무덤에는 그의 부모님과 남동생이 잠들어 있다. 가족이란 대개 우연히 만나 형성되는 인간관계이기에 그 역시 보살피지 못했다는 죄책감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도 있었겠지만, 작가는 차마 무덤에서 한 발도 떼지 못하고 차라리 분열하는 편을 택한다. 두 개의 무덤이 스무 개의 나를 낳아서 그의 그림은 삶처럼 죽음에 뿌리를 둔다.
그런데 여기, 1980년대 한국의 불온한 시대상까지 뒤얽힌다. 최철환(최민화의 본명)은 '민중은 꽃이다'를 의미하는 호(號) '민화(民花)'를 1982년부터 예명으로 사용하기 시작하는데, 전시 출품작 중에서 보자면 1976년에 그린 「부랑」을 제외하고는 전부 '최민화'의 그림이다. 젊은 최철환이 부랑했다면, 중년의 최민화는 「부패」한다. 이 전시는 방황하는 최철환과 자괴라는 우물에 고여 썩은 최민화가 만들었다. 부랑과 부패 모두 현실에 안주하는 상황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러나 부랑과 다르게 부패는 현실에 정착한 이후에만 가능하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현실에 환멸을 느낀다는 것은 즉 그가 현재 있는 자리를 직시한다는 사실을 증명하며, 동시에 앞으로 있을 자리를 그 스스로가 선택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1984년에 1년 2개월 정도 미국에 다녀왔어. 학교 선생을 멀쩡히 하다가 도저히 못 견디겠는 거야. 내 욕망과 현실이 너무 충돌하는 거지. 광주 사태도 이미 벌어져 있는 상황이었고, 세계적인 화가가 되고도 싶고. 이런 고민들이 충돌하니까 당시의 나로서는 많이 힘들었어. 그래서 갔는데, 가서는 결국 안 되겠다, 하고 돌아왔어. 돌아와서 민주화운동을 하고, 가기 전보다 더 열심히 하는 방법밖에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거기까지 갔는데, 도저히 안주를 못하겠더라고." (최민화)
잠시 도미하면서 꿈(세계적인 화가)과 현실(광주 사태) 사이를 고민하던 작가는 결국 좀먹은 현실로 돌아오고야 만다. 외면세계를 외면하지 못한 채 싸우고, 그리면서, 끝이 불확실한 투쟁을 "더 열심히" 벌이는 것만이 그가 버틸 수 있는 방법이며, 민중과 그림을 사랑하는 방식인 것이다.
나는 사랑을 하고 죽어 가면서, 또 간간이 죽음을 보면서도, 그것들이 도대체 무엇인지 모른다. 그저 조금씩 더 자주 암묵해 갈 뿐이다. 해갈될 수 없는 물음이 우리에게 갖는 의미는 과학적으로 원인을 분석하는 '왜'가 아니라, 경험하면서 체득한 사례를 통해서만 가느다란 실마리를 얻을 수 있는 '무엇'에 있을 것이다. 사랑을 해 본 후에 사랑에 대해 정의하고, 노화를 체감한 후 늙음이 무엇인지 가늠하듯이, 성숙은 언제나 귀납적으로만 가능하다. 그리고 그 과정에 먼저 절감하고 좌절한 최민화가 있다. 희망과 절망 사이의 무수함에서 탄생한 최민화의 그림이 있다. 만일 그가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거나 투쟁했어야만 했던 잔인한 역사가 한국에없었다면 그의 일생에는 더욱 다행인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최철환은 최민화가 될 수밖에 없었고 최민화로 살고 최민화의 그림을 그려서, 그가 절망한 시절과 여전히 다를 바 없는 현실에서 그의 그림을 볼 수 있기에 다행은 지금 우리의 몫으로 남았다.
* 부기 최민화는 그의 18번 노래인 신중현의 「아름다운 강산」을 부를 때면 "오늘도 너를 만나러 가야지 말해야지 먼 훗날에 너와 나 살고 지고 영원한 이곳에 우리의 새 꿈을 만들어 보고파"의 가사 '새 꿈'을 '슬픔'으로 개사해 부른다. 작가는 단순히 착각했다지만, 어쩐지 그에게는 '슬픔'으로 바꾼 버전이 퍽 어울리기만 하다.
_이현(미술비평)
서문 : 이현
촬영 : 홍철기
도움주신 분들 : 김유경, 김정대, 김진하, 권진,
이성대, 이성민, 장자인, 최금수
최민화 개인전
두 개의 무덤과 스무 개의 나
2016.5.5 -
5.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