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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 -창세기 5장 1-5절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창세기 6장 1-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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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말씀과 더불어 ‘족보’도 있었다. 성경이 시작되는 창세기부터 끊임없이 열거되는 아담의 계보. 문뜩 이런 의문이 든다. 분명 남자와 여자를 같이 창조하셨는데 왜 창세기 5장의 32절 내내 여성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가? 계속해서 생산된 아들들의 이름을 거쳐 처음으로 여성의 존재를 마주하게 되는 것은 그다음 장인 6장 1절에 가서다. 바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땅 위에 번성한 사람의 딸들을 자신의 아내로 삼은 것. 게다가 아내로 삼은 기준이 공교롭게도 ‘아름다움’이라니, 그야말로 ‘Holy moly’다.

   가족을 생각한다. 그리고 친족을 생각한다. 인류의 등장과 더불어 필연적으로 짊어질 수밖에 없는 숙명을 꼽자면 바로 진하디 진한 핏줄과 그것으로 이어진 혈족 관계일 것이다. 태어난 순간부터, 아니 태어나기 이전부터 나는 누군가의 가족과 가문의 일원이 될 수밖에 없다. 이 ‘굴레’는 또한 평생 나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정의하는 하나의 판단 근거가 된다. 정상 가족과 결핍 가족의 구분은 나의 정상성과 결핍으로 전이되고, 정상적 가족을 구성하고 유지하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삶의 목표가 되기도 한다. 그럼, 질문을 해보자. 누가 그리고 왜 정상과 비정상의 기준을 정하는가? 

   너무도 당연하고 자연적으로 여겨졌기에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았던 이 사적인 영역을 둘러싸고 생각보다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맥락들이 작동한다. 역사적으로 혼인은 단순히 사랑의 결실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여성의 교환에 따른 가계의 경제와 권위 유지가 중요한 목적이기도 했다. 또 하나의 중요한 기능을 꼽자면 바로 종족과 혈통 유지를 위한 재생산일 것이다. 종족과 혈통을 유지하는 것은 가족과 친족을 사적 영역을 넘어 공적 관계 속에서 바라본다는 것이며, 이로써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의 구분이 명확한 것이 아님을 스스로 드러낸 것이다. 이러한 기능은 가정 안에서는 물론 공적 영역에서까지 남성의 지배와 권위를 강화했고,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자행되는 개인의 억압과 여성의 가사 노동은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은폐되었다. 또한 한부모 가족, 비혼, 동성 결혼 등 ‘자연적’이고 ‘정상적’인 경계의 바깥에 존재하는 관계들은 비정상으로 규정되며 금기되어 왔다. 1인가구, 한부모가정, 비혼 동거 가족, 다문화가족이 증가하고, 결혼 제도 밖에 있는 다양한 가족 구성을 보장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차 커져가고 있지만, 결혼-임신-출산이라는 정상적인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의학기술의 도움을 받아 출산을 한 방송인 사유리를 두고 갑론을박이 팽팽하게 이어진 사례는 우리 사회가 여전히 ‘가족’이라는 신화로부터 자유롭지 않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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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습과 형태가 계속 변모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바로 ‘가족’ 그 자체일 것이다. 가족의 형태는 다르지만 우리는 계속해서 가족을 만들어야 하고, 그 가족은 사회 구성의 최소 단위로서 사회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매개체가 된다. ‘국가’라는 단어가 나라 국(國)과 집 가(家)로 만들어진 것처럼, 국가와 가족이 연결된 이상 나의 국가는 너의 국가와 구분되고 나의 국가가 아닌 것들은 후순위로 밀려난다. 이처럼 가족과 친족이라는 경계는 ‘나’와 ‘우리’라는 친밀성을 만드는 한 편, 나(우리)와 타자의 경계를 나누는 차별과 배제의 기제가 되기도 한다. 나에게 친절한(kind) 친족(kin)이 다른 사람에게도 친절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관용정신, 다원주의, 글로벌리즘을 내세우며 타자에게 관대해 보였던 세계는 언젠가부터 다시 국경의 장벽을 높이고 있고, 차별과 배제, 전쟁, 환경 파괴는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코로나-19(COVID-19)로 인해 수많은 사망자가 발생하자 각국은 국경을 통제하는데 총력을 다하고 있으며, 세계 곳곳에서 아시아인은 마치 코로나바이러스의 전염원인 양 잠재적인 폭력의 대상이 되었다. 세계는 문을 꼭 닫은 채 자기 가족(국가)의 안위만을 염려하는 중이다. 

   이러한 차별과 배제의 또 다른 편에 비인간 생물종이 있다. 지극히 인간중심주의적인 가족과 친족 개념에 동물과 식물, 박테리아 등의 자리는 없다. 도나 해러웨이(Donna J. Haraway)는 자신의 글 「인류세, 자본세, 대농장세, 쑬루세―친족 만들기(Anthropocene, Capitalocene, Plantationocene, Chthulucene: Making Kin)」에서 친족을 조상과 계보로 묶인 개체와는 다른 혹은 그 이상의 것으로 만드는 데 목적을 두고 있음을 밝히고, 지구상의 다양한 생명체들이 공존하기 위해 새로운 생태 정의가 필요함을 역설한다. 더 급진적으로는 지구상에 인구가 너무 많아 발생하는 생태 위기를 논하며 “자식이 아닌 친족을 만들자!(make kin, not babies!)”고 말한다. 여기에서의 친족은 인간뿐만 아니라 식물, 동물, 미생물 등 비인간 생물 모두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다양한 종 사이의 친족 만들기를 통해 인류가 직면한 생태학적 위기에 대응하고자 하는 의도가 내재되어 있다. 이와 같은 친족이 유의미한 것은 ‘가족’을 넘어서는, 즉 인간중심의 가족주의를 해체하고 차별과 배제, 폭력, 환경오염 등이 전 지구적으로 만연한 사회에서 인간과 비인간이 공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도나 해러웨이의 글 「카밀 이야기(Camille Story)」는 그의 저서 『트러블과 함께하기-자식이 아니라 친척을 만들자(Staying with the Trouble: Making Kin in the Chthulucene)』의 마지막 챕터에 나오는 우화로, 도나 해러웨이와 동물행동학자 뱅시앙 데프레(Vinciane Despret), 영화 〈도나 해러웨이: 지구 생존 가이드(Donna Haraway: Story Telling for Earthly Survival)〉의 감독인 파브리지오 테라노바(Fabrizio Terranova) 세 명이 공동으로 창작한 과학소설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카밀 공동체는 황폐해진 장소에 자발적으로 이주하여 그곳을 치유하고, 인간은 물론 비인간 파트너들과의 공생을 위해 세대를 거듭하면서 친족을 만들어나가는 실험을 지속한다. 이러한 변화의 맞은편에는 여전히 인간과 비인간의 구분, 배제, 차별이 존재하고 끊임없는 갈등과 반목이 발생하지만, 이들은 결코 트러블을 외면하지 않고 트러블과 함께 사는 방법을 터득하고자 실험을 멈추지 않는다. 소설은 카밀 5세대에서 끝나지만, 이들은 도래할 카밀 6세대들이 세계에 대응해나갈 수 있도록 계속해서 그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전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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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카밀 6》는 「카밀 이야기」의 마지막 장을 이어가는 또 다른 챕터라 할 수 있다. 전시에 참여한 다섯 명의 작가는 오늘날 변화하고 있는, 그리고 변화해야 하는 가족과 친족의 개념을 사유함으로써 가족, 친족, 친척의 의미를 해체·재구성하고, 서로 다른 성(性)과 인종은 물론, 인간과 비인간이 함께 공생할 수 있는 동시대적 공동체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홍민키의 〈들랑날랑 혼삿길〉(2021)은 성소수자인 주인공이 겪게 되는 이성애 가족의 경험과 그 안에서의 커밍아웃, 그리고 자신의 오래된 남자친구와 결혼에 대한 고민을 가족 인터뷰를 통해 당사자들의 시점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친형이 여자친구와 결혼하며 안정적으로 사회 제도에 진입한 반면, 주인공은 결혼, 비자 등 제도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에서의 동성결혼에 대한 인식에 부딪힌다. 아들의 성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비교적 ‘쿨(cool)’한 가족의 면모를 보여주면서도, 친형의 사돈에게 ‘굳이’ 정체성을 밝힐 필요가 있는지, 결혼은 외국에 나가서 하는 게 더 나을 것이라는 등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편견과 스테레오타입화된 인식은 전통적, 보편적인 이성애 가족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것이 여전히 어려운 것임을 드러낸다. 이러한 한계 상황에서도 주인공과 가족 간의 솔직하면서도 경쾌한 인터뷰는 불화, 충돌, 협상을 통해 끊임없이 대안을 모색하려는 이들의 노력을 엿볼 수 있게 한다. 

   홍민키가 혈연과 혼인으로 이뤄진 친족의 삶을 조명한다면, 주황은 동시대 비혼 여성 공동체로 카메라 렌즈의 방향을 돌린다. 대전 페미니스트 문화기획자 그룹 보슈(BOSHU) 팀이 공동으로 집필한 『피리 부는 여자들』에는 다양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비혼 여성의 삶과 관계들이 등장한다. 이 책에서 제목을 따온 주황의 〈피리 부는 여자들〉(2021)은 대전 선화동을 거점으로 모인 세 명의 비혼 여성이 공동체를 이루고 돌봄의 관계를 만들어가는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각자의 주거지는 다르지만, 함께 모여 밥을 먹고, 산책을 하며, 운동을 하는 등 이들의 삶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한 편, 비혼 여성 거주지로서의 조건을 충족시켜주었으나 이제는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인해 옛 도심의 흔적을 잃어가는 그들의 삶의 터전은 비혼 여성 공동체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것 이면에 사회 경제적 역학 관계가 작동하고 있음을 넌지시 암시한다.  

   친족은 비인간 생물종과의 관계에서도 살필 수 있다. 흙, 개, 소, 문어 등 조은지의 작업에 등장하는 다양한 생물종은 인종과 계급, 젠더와 섹슈얼리티, 인간과 비인간의 구분과 차별을 공고히 해온 경계에서 해방되어 새로운 공생과 화해를 발생시키는 존재라 할 수 있다. 특히, 작가에게 ‘변신’은 매우 중요한 개념으로, 다른 지역과 국가를 넘나들며 적응하고 살아낼 수 있는 하나의 방식이자, 다른 사람은 물론 비인간 생물종과 관계 맺기 위한 사유의 도구가 된다. 변신은 내가 또 다른 내가 되는 것이며, 나였던 것이 타자화되는 방식이기도 하다. 〈별, 털 그리고 변신에 관한 사유〉(2021) 등 일련의 신작에서 작가는 변신을 통해 모든 것이 동등해지는 세상을 상상한다. 수많은 촉수(tentacle)로 주변을 더듬고 상대를 연결하는 촉수성(tentaculaity)이 “스스로 닫지 않고 완성되지 않는” 쑬루세에 관한 이야기에 필요할 것이라는 해러웨이의 언급처럼, 작품 속 머리카락과 털은 ‘카밀 6’의 서사에 필요한 촉수가 된다. 

   생물 및 생태를 시각정보나 예술로 환원하는 문화적 관습에 관심을 가져온 이소요가 주목한 것은 서울시 하늘공원에 서식하는 ‘야고(野菰)’다. 하늘공원은 1970년대 후반부터 서울의 쓰레기 매립지로 사용되었으나, 2002년 월드컵을 계기로 공원 조성 사업을 통해 다양한 식물들이 이식된 교란된 환경이다. 이곳에서 야고를 발견한 작가는 씨를 자생지를 답사하고, 채종을 통해 심어 기르며 억새와 야고가 공생하는 모습을 체득한 후 이를 〈야고(野菰), 버섯 같은 것〉(2021)에 담았다. 광합성을 하지 못하는 야고는 억새를 비롯한 다른 식물에 활착하여 양분을 얻어야 살 수 있기에, 식물계에 속해 있으면서도 균계 생물인 버섯과 비견되는 형태와 생태를 가진다. 야고의 삶을 관찰한 작가는 식물계와 균계 생물명에서 공통적으로 사용되는 한자 ‘菰(고)’와 우리나라 생물 향명에 등장하는 친족어휘 ‘아재비’를 살피면서 유형화와 규칙을 넘나드는 생물의 공생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의 시작과 끝을 가까이서 지켜본 이소요 또한 새로운 친족을 만드는 과정에 엮여 들어가는 것과 다름 없다.  

   염지혜는 〈심바이오플롯: 함께 사는 터〉(2020)에서 지구상의 모든 생명을 ‘공생’이라는 고리로 연결하여 ‘함께 살기’를 탐구한 바 있다. 작가가 주목하는 공생의 개념은 “종이라는 개념 자체가 공생을 전제로 한다고 믿”으며 “세균들이 서로 융합하여 식물과 동물의 조상들을 비롯한 더 큰 세포들을 만들”었다는 린 마굴리스(Lynn Margulis)의 세포 내 공생이론에서 출발한다. 마굴리스의 주장과 같이 만약 “세포, 조직, 기관, 그리고 종들”이 “박테리아나 고세균의 공생을 통해 진화해왔다”면 사실상 모든 종은 공통의 조상을 공유하는 것과 마찬가지일 테이다. 작가는 안료를 갤 때 사용하는 계란의 노른자로 인해 세균이 증식할 수밖에 없는 템페라를 사용하여 화면에 세균을 적극적으로 불러들임으로써 여러 종의 공생을 형상화한 작품 〈강강술래〉(2020)와 〈동그라미〉(2021)를 선보인다. 서로를 맞잡은 손의 경계가 점점 흐려지고 서로를 침투하며 하나가 되는 듯한 화면은 충과 세균이 뛰노는 만찬장이자 인간과 비인간 생물종이 공생하는 새로운 영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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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밀 6》는 인간과 비인간 생물종이 새로운, 그래서 기이한 친족(oddkin)을 만들어가는 영토를 기꺼이 내어주고자 한다. 그리고 이러한 공생의 영토에 또 다른 이야기를 보태는 다섯 명의 연구자들이 있다. 김은주는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친족을 넝쿨식물의 땅속줄기인 ‘리좀(rhizome)’에 빗대어 다른 존재와의 연결을 통한 친족의 가능성을 제안하고, 서보경은 인류의 가장 오래된 분야인 친족 만들기의 창조성을 인류학적 연구를 경유하여 살펴본다. 최유미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피폭된 지역에 남겨진 소를 돌보며 반려 관계를 맺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권사랑은 비혼 여성 공동체로 살아가면서 서로가 서로를 돌보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마지막으로, 이민주는 소셜 미디어와 디지털 의존도가 높아지는 오늘날 ‘가족’적인 것으로 연대와 공동체를 조직하기를 상상한다. 사전 연구로 출발하여 연구자의 자문과 리서치 워크숍을 통해 전시로 발전된 만큼, 참여자들의 관계성과 작업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이번 전시가 동시대 친족을 사유하는 가능성을 제공해줄 수 있지 않을까.

   누군가에게는 전시장에 펼쳐진 다양한 친족 관계가 불편할 수도, 이해하기 힘든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누군가에게는 당연하고 자연적으로 여겨온 가족과 친족의 모습이 불편하고 고통스러웠다는 것을. 다시, 친족을 생각한다. 알래스카의 이누피아트(Iñupiat)족은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친족이 된다. 이들은 평생 4-5개 이상의 이름과 가족을 얻을 수도 있으며, 그들이 꼭 자신을 낳아준 생물학적 친부모일 필요도 없다. 출생은 친족을 이루는 데 있어 결정적인 요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 역시, 동시대 새로운 친족을 만들어가는 우리를 ‘카밀 6’로 호명해보겠다. 카밀 6의 이름을 부여받은 우리는, 도래할 카밀 6세대가 황폐화된 세계에서 살아나갈 수 있도록 이야기를 전했던 카밀 5의 유산을 이어받아 카밀 7에게 또 다른 이야기를 전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카밀 6》가 이야기의 마지막 페이지가 아니라 카밀 7을 예견하는 서론이기를, 그래서 이 땅의 모든 인간과 생물종들이 평등하게 공생하는 그 날이 오기를 상상해본다.  

_장서윤(독립 연구자)

진행 : 박지아

글 : 권사랑, 김은주, 서보경, 이민주, 최유미

공간디자인 : 권세정, 김연세

도움 : 권동현

디자인 : 장유정

2021.10.16 -

11.14

카밀6

기획 : 장서윤

참여 작가 : 엄지혜, 이소요, 조은지, 주황, 홍민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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