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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평 개인전 <재녀덕고才女德高>를 열며

합정지구는 2017년 8월 4일부터 27일까지 작가 김지평 개인전 <재녀덕고才女德高>를 개최합니다. 김지평 작가는 그동안 꾸준히 동양화 혹은 한국화의 기법과 양식을 통해 현대 시대의 세계관을 이야기해 왔습니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전통회화에서 금기되어 온 여성성의 언어를 강조하고, 나아가 이 금기의 언어를 자유롭게 하는 회화의 구체적인 방법을 짚어봅니다. 전시의 제목 ‘재녀덕고'는 중국 여성화가 양옌핑(梁燕屛)이 1980년대에 발표한 작품 제목을 따온 것으로, ‘재기 있는 여성은 덕이 높다'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작가 자신의 신념을 주장하는 이 한자성어는, 여성은 재능이 부족해야 덕이 있다는 유교적 가치관에 대한 도전적인 대응이고, 동시에 ‘여성의 재능'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되묻는 화두가 됩니다. 작가는 전시에서 음(淫)과 색(色), 혹은 일반적으로 드러내기를 금기시하는 성(姓)에 대한 욕망을 뜻하는 부정한 기운의 개념을 적극적으로 표출하고, 이에 대한 기존의 질서나 표상을 훼방하여, 역설적으로 여성성의 자아를 복귀시킵니다. 그리고 이것을 펼쳐보이는 근간에는 사회적으로 여성이면서 미술적으로 재능있는 작가가 위치한 시간과 공간, 다른 말로 전통과 현대가 교차하는 비선형적인 역사적 ‘시간’과 지겹다고 착각하지만 늘 새로운 미술 정체성의 지역적 ‘공간' 이라는 복합적인 맥락을 엮어서, 한층 다채롭게 펼쳐보입니다.

다른 전시에서 이미 선보였던 <음(淫)>(2014) 그리고 <초혼>(2017)과 더불어 이번 전시에서 처음으로 보여주는 <blood and wine>(2017), <잠시 다녀갑니다>(2017), <그녀에게>(2017), 그리고 <루루루루>(2017)와 같은 최근작은 공통적으로 ‘여성'을 표상하는 연지곤지, 혼례의 액막이용 호피무늬, 족두리와 같은 구체적인 기물, 민화, 미인도나 실경산수와 같은 전통의 도상학, 그리고 신체에서 나오는 폐기물인 피와 눈물을 연상시키는 액체의 흘러내림을 표현합니다. 이들은 모두 동양화 전통에서 찾은 신화 텍스트나 영화 속 여성 캐릭터를 모티브 삼아 특정 내러티브를 구사하는데, 이것은 서사를 위한 서사라기 보다는, 서사가 함의하는 기호와 관념으로 미술적 상상의 틀을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재기발랄하고 쉽게 예측하기 힘든 작품의 제목들이 암시하듯이, 평면과 입체, 전통적인 매체와 현대적인 미디어를 넘나드는 작품들을 보면서 우리는 단숨에 무슨 이야기인지 알아차릴 순 없지만, 작품마다 숨겨둔 힌트를 찾아다니듯 작가가 이끄는 대로 ‘재녀덕고'의 깊은 골짜기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들 작품이 표면적으로는, 혹은 일반적인 인상으로는 언뜻 전통적인 양식으로 표현한 신화와 장식의 세계처럼 보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전통의 기술, 미술과 문학의 상호텍스트성, 환타지적 서사가 전하는 세계관, 탈금기의 정치성이나 매체의 주체화 등 대단히 복합적으로 실제에 조응하는 체험적 세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무한히 확장하는 미술의 공간 안에서 현대의 재녀 김지평은 전통과 동시대, 꿈과 자연, 회화와 미술의 풍경​ ​사이를​ ​자유롭게 거닐어 다닙니다.

특히, 이들 공간이 주선하는 전통과 현대의 만남은 현대적인 정신에 전통 회화의 마스크를 씌웠다는 식으로 단순하게만 결론 짓지 않습니다. 이 만남에는 우리가 읽을 수 있는 도상과 읽을 수 없는 도상이 결합하여 ‘전통’을 질문하고, 기존의 도상 자체를 지워내는 주체로써 음란한 여성이 복수의 암시로 등장합니다. 또한, 기존의 현대 미술 세계에서 친숙한 매체인 비디오와 사운드, 그리고 낯선 매체인 산수화와 병풍 사이를 오가면서 벌이는 입체적인 흐름은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는 혼돈을 야기합니다. 이 혼돈의 이유는 아마도 그가 유창하게 구사하는 전통의 언어에 대한 정체를 쉽사리 밝히거나 정의내릴 수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은 그의 언어가 유창한지 아닌지 판단을 내릴 근거조차 마땅치가 않습니다. 그리고 그가 욕망의 주체로 그려내는 여성이 비장하고, 결연하고, 처연하고, 정적이다가도 돌연 용감하고, 과감하고, 비상하게 변모하는 등, 그 존재가 걷잡을 수 없이 생생하게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혼돈의 힘, 다른 말로 ‘현대에서 전통하기’라는 작가 특유의 어법은 <삼원법>(2017), <기운생동>(2017), 그리고 <모심>(2017)과 같이 현대 미디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작품에서 오히려 구체적으로 느껴집니다. 다른 언어로는 온전히 번역될 수 없으면서 사실상 본연의 의미 조차 모호하게 남아있는 전(前)근대의 한자개념어, 서구식 원근법에서 벗어나서 낯설어져 버린 화면의 구도, 소실점의 부재로 인해 방황하는 시선, 그리고 현대적인 설치미술보다 더 파격적인 빈 병풍의 강렬함은 ‘지금’의 시대에 ‘이곳’이라는 장소에서 진행되는 미술의 정체와 가치에 대해 본격적으로 질문합니다.

다시 이번 전시의 문을 여는 ‘여성'이라는 주제로 돌아가보면, 이 ‘여성'은 사회에서 이분화된 남성이 아닌 여성이 아니라, 일반적이고 표준적인 여성의 역할이나 태도에서 해방된 세계관으로서 여성입니다. 또한, 이 ‘여성'은 근대화를 거치면서 탈락되었지만 여전히 현대와 닿아있는 전통이라는 관념을 칭하는 다른 단어가 되고, 그동안 억압되어 왔지만 실제 했던 가려진 세계로 향하는 경로를 여는 문이 됩니다. 작가는 동양적 가치의 연장선에서 여성이라는 존재를 주목하고, 그것이 남성 중심으로 이루어진 기존 세계와의 충돌이나 극복의 존재이기 이전에 서로 상동하고 상승할 수 있는 해방된 욕망임을 환기합니다. 이 욕망의 감각은 어떤 소재를 표현하거나 묘사하는데만 그치지 않고, 그려내는 대상을 끊임없이 분석하고 볼 때마다 달라 보이는 화면에 대한 반응과 살아있는 경험을 추동해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은 자칫 기존 권력의 전복 매개 혹은 위계적인 사고방식으로만 해석될 수 있는 기존의 “여성주의적" 관념, 관련한 현실적인 상황이나 고착적인 사고방식, 선형적인 시간의 차원을 건너뛰어 보다 근원적이고 창조적인 에너지로 재형성됩니다. 결국 우리가 그동안 충분히 의식하지 못한 ‘여성’만이 아니라 ‘여성의 재능'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무수한 재능 중에서도 우리가 생각해야 할 ‘재능'은 ‘좋은 미술'에 대한 요청과 이를 위한 본질적인 감각의 해방, 혹은 이것에 대한 욕망일지도 모릅니다. 이 욕망은 “욕망을 가능하게 하는 결핍"에 대한 정확한 인지에서 출발할 수 있을 것입니다.

_권진

글 : 권진, 이빛나, 박찬경

디자인 : 이수진(스탠다드타입)

전시 촬영 : 홍철기(스튜디오 수직수평)

김지평 개인전

재녀덕고才女德高

2017.8.4 -

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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