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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

  박은정은 손이 큰 살림꾼이다. 까까, 봄봄, 씨씨 세 마리 고양이와 무성한 베란다 정원, 골목의 화분들, 텃밭 농사까지 그녀가 돌보는 식구들의 규모는 만만치 않다. 번듯한 ‘내 집’은커녕 동교동, 연남동, 연희동, 신사동 산새마을, 여러 번의 이사를 다니면서도 터를 잡는 곳마다 동네며 집안팎 구석구석에 자신의 ‘공동체’를 꾸린다. 친구들과 텃밭을 일구고 함께 김장을 담그고, 옥상이든 베란다든 화분을 들인다. 부엌살림을 신경 써 장만하고, 커다란 테이블을 짜고, 빌트인 가스렌지와 오븐을 마련해 친구들을 불러 거나하게 밥을 지어 먹인다. 정말이지 그녀는 고독과 창작열에 자신을 소진시키는 화가의 면모와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이 살림꾼은 자신의 생활 반경 속 인연들을 그린다. 그러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인연’들은 가족이나 친구가 아니라, 이 사람들과의 삶을 둘러싼 살아있는 존재들, 꽃과 나무, 식물들이다. 때문에 박은정의 식구들은 사람, 동물, 식물이란 구분 따윈 필요 없이, 언제나 함께했으면 하는 존재들, 급격한 세상의 변화와는 다른 시간을 살아가는, 느리게 커가는 존재들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2011년부터 자신의 일터와 작업실을 두어온 문래동은 그녀에게 강렬한 생명력의 공간으로 다가왔다. 철공소와 낡은 상가들, 쇳가루와 소음이 있는 이 골목들 사이사이에 화분, 나무, 이름없는 식물들, 고양이들과 같은 주변적 존재들이 그녀에게는 삶의 중심이자 생명의 에너지로 각인되었고, 작업의 큰 줄기가 되었다. 아울러 그녀의 ‘문래동시대’는 일터가 된 ‘쉼표말랑’의 여유, 도시텃밭, 이웃·친구들과 함께 나누는 시간들, 그림에 집중할 수 있는 일상의 패턴을 찾게 된 오아시스의 시간이기도 하다. 그녀가 캔버스에 붓질로 가득 담은 식물들과 골목의 모습은 그저 풍경이 아니라, 그렇게 되살아나는 생명력이 깃든 시공의 기록들이다. 창문으로 모란꽃과 감나무 잎들이 넘어오고 까까와 동네 고양이들이 담장을 넘나들던 연남동 집은 그녀의 정성과 온기가 구석구석 스며있던 삶 터였다. 최근 다시 그린 <내 방(연남동)>은 이 경계 없는 살림살이에 깃든 따뜻한 정서를 오래도록 기억하고 응시하고픈 그녀의 욕구를 가장 생생하면서도 아련하게 보여준다. 

  미니멀리즘과 하얀 대리석과 같은 인테리어의 유행은 도회적이고 현대적인 살림살이에 매복한 위생과 효율성의 가치를 강박적으로 보여준다. 고양이든, 식물이든, 사람 친구든 어딜 가든 식구를 늘려가는 박은정의 살림살이는 저 간결함, 깨끗함, 편의성, 개발의 속도와는 전혀 다른 소우주를 구축한다. 급변과 상실에 맞선 이 구축이야 말로 그녀의 작업의 출발점이자 전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한수자는 아이 둘을 돌보며 틈틈이 그림을 그린다. 결혼과 출산이라는 사건은 그녀를 자기와의 싸움이라는 창작의 세계에서 육아와 살림이라는 또 다른 전장으로 옮겨놓았다. 그리고 싶은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면 놓칠 새라 펜을 찾던 그녀의 습관이 무색해지리 만치 이제 자신을 다그치며 달려야 할 ‘자아실현’은 희미해진 신기루가 되어 버린 듯하다. 연인으로 비슷한 꿈을 꾸고 창작자의 길을 함께 걸었던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그렇게 ‘엄마’와 ‘아내’라는 낯선 궤도에 자신을 올려놓아야 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림을 그린다. 어떤 목표나 루트도 없이, 조급할 것도 없고 못 그린다고 아쉬울 것도 없다는 듯이, 그렇게 가느다란 길을 가듯 그림을 그린다. 

   “조금 천천히 크는” 첫째와 매일 같이 치료실을 오가는 그녀는 어디서나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작은 수채화 도구들을 가지고 다닌다. 치료실 밖에서 아이를 기다리며 눈에 들어오는 풍경들, 다른 아이와 엄마의 모습, 오늘 아침의 집을 나설 때의 모습, 자꾸만 눈에 아른거리는 순간들을 그린다. 그녀의 그림에서 배어나오는 가족의 모습은 아이 둘을 키우며 고군분투하는 자전적인 ‘인간극장’도, 밝고 화기애애한 ‘행복한 우리집’의 이미지도 아니다. 어디부터 손대야 할지 모르게 설거지감이 쌓여있는 싱크대, 이해 못 할 아이의 세계와 당혹감, 후회스럽고 애틋한 순간들이 숨김도 꾸밈도 없이 말갛게 드러난다. 틈틈이 한 장씩 그리는 그림들은 이렇게 그녀의 소소한 일상을 열어 보여주지만, 여기에는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위해 내가 겪는 구속이나 결박의 아픈 흔적도, 일방적인 희생에 대한 억울함이나 체념도, 모성적 파토스도 없다. 그저 어정쩡하고 담담하게 가족이란 존재를 살아내기, 두려움과 불안에 대한 예방접종 같은 거리 두기, 때론 멍할 정도로 예쁘고 신기한 아이의 모습들이 담겨 있다. 그녀에게 그림을 그리는 시간은 잠시 밖에 나와 찬바람을 맞으며 담배 하나를 태우는 개운함과 같은 것이라고 한다. 가족이라는 친밀하고도 끈끈한 사적 공동체 안에서 거세할 수 없는 작은 탈주의 욕망과 떨궈버릴 수 없는 애정이 물감 자국으로 종이를 적시고 나면 그녀는 한결 가벼워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많은 여성들은 결혼과 더불어 자신의 삶과 멀어지고, 모성이 욕망을 대체한다고 한다. 과연 그렇게 딱 잘라 말할 수 있을까? 자기의 욕망과 모성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엎치락뒤치락하는 순간들, 원망, 자책, 행복, 고마움, 사랑이 하루하루로 엮이는 이 실타래를 그녀는 그림으로 풀어놓는 듯하다. 

 

  박은정과 한수자의 그림에서 우리는 모성적 사유라는 이미지를 길어 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모성성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일면 따뜻하고 아름답지만 어딘가 불편하다. 돌봄과 양육을 타고난 여성의 본능이자 사회적 역할로 간주하는 이데올로기와 관행을 떠올리게 하고, 남성성을 호전성과 폭력으로, 여성성을 평화, 혹은 희생자로 상징화시키는 일련의 이분법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사라 러딕은 모성적 사유를 이렇게 이야기한다. 어머니란 생물학적 출산자를 의미하지 않으며, 모성성이란 모성 이데올로기 또는 모성적 신화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 대신 상처 입기 쉬운 존재들, 연약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때로는 나에게 공포와 불안을 안겨주는 타자와의 공존이야말로 모성적 사유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언제까지 함께할 수 있을지 모르는 불안을 껴안고, 이 무력하고 느리게 자라는 존재들과 함께 살아가기, 그 ‘살림’과 ‘살아냄’의 기운을 이 그림들에서 한 웅큼씩 건져가시길 빈다.   

_이진실

그래픽디자인 :  톱니귀

살림

기획 : 이진실

참여작가 : 박은정, 한수자

2018.3.3 -

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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