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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의 명징성을 찾아서: 살아있는 아름다운 것들

 

 

작가 박현정이 ‘지금’이라는 시간 안에서 이미지를 생산하는 ‘방법'을 찾고 있다는 것을 포착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 방법은 본인이 만들어가는 나름의 논리적인 규칙 안에서 적극적으로 작동한다. 우리가 이 규칙을 알던지 모르던 지간에 그의 이미지들은 미술에서 특정 장르나 정형성을 이름 짓기 위한 영토 안으로 순순히 들어가지 않는, 달리 말해 쉽게 유형화되는 작업이 아니다. 아주 조용히, 모든 것을 거부한다. 그리고 이것만으로도 우리는 그의 방법을 읽어내기 위해 노력해볼 가치가 있다.

  첫 개인전이다. 그동안 ‘굿-즈’(2015)의 미술 유통 활동, ‘스튜디오 파이’(2014-현재)에서의 미술 커뮤니티와 교육 활동, 서울시립미술관 비엔날레 미디어시티서울 ‘네리리 키르르 하라라’(2016) 출판물 ‘그런가요’ 필진과 소장품 프로젝트의 참여 등을 통해 젊은 작가 박현정의 이름을 들어본 바 있지만, 정작 그녀가 어떤 작업을 하는지는 이제야 본격적으로 접해보는 반가운 기회다. 작가 박현정은 의식과 무의식에 자리 잡은 시간과 공간의 기억을 드로잉으로 시각화한다. 의식, 무의식, 시간, 공간, 기억 이라는 이 추상의 대표적인 단어들이 어떻게 점, 선, 면, 색을 통해 박현정식으로 시각화 되는지가 결국 그의 방법을 추적하는 하나의 실마리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고전적인 의미에서 드로잉이라는 장르를 ‘이미지’라는 말로 둔갑시킨 작가의 의도가 결국 기술적인 의미에서의 드로잉보다는 매체로서의 회화에 접근하는 개념적인 의도를 역설한다는 지점이다. 그의 화면에는 알 수 없는 점과 선이 면을 도려내고, 구름이나 연기 같이 보이는 무언가가 몽실 거리고, 원이나 사각형처럼 기하학적인 요소들이 서로 충돌하거나 적당한 거리에서 긴장 관계를 만들며, 지극히 절제된 색이 공간으로 스며든다. 각각의 요소들은 서로를 적당히 밀어내고 때로는 당기면서 팽팽함을 유지한다. 모호하기 짝이 없는 이 세계가 대체 어떤 명징성을 획득하기 위해 어떻게 달려가는 것인가?

  먼저, 이미지 생산의 방식을 살펴보자. 작가는 직접 그린 어떤 그림을 스캔해서 파일로 변환하여 대상화한다. 이렇게 파일로 변환된 이미지를 일러스트레이터와 같은 그래픽 툴로 불러와서 하나의 분자단위, 혹은 벡터vector로 다시 변환하고, 이들 중 일부는 표본specimen으로 추출되기도 하고, 새로운 정렬align을 통해 기존의 형체를 분리하고 새로운 질서로 변주해 나가기도 한다. 이 과정은 흡사 자연의 힘과 힘의 운동성을 증명하기 위해 분석을 통해 규칙을 구하고 여기에 나머지를 더하여 구조를 찾아낸 과학자 뉴턴처럼, 작가는 나름의 엄격한 규칙을 기반으로 이미지를 구성하는 요소들을 구별하고, 개체화해서, 변주해 나간다. 그리고 이 규칙은 자신만의 이미지를 성립시키는 하나의 현상을 이해하는 수단으로 작동한다. 예를 들어, 작가가 아주 작은 나선형의 몽글거리는 선이 피슝하고 튀어나가는 것 같은 구성을 그렸다고 치자. 이 그림을 파일로 옮겨 대상으로 만든다. 그리고 이 대상 안에서 a 부분과 b 부분이 각각 요소로 구분되고, 프로그램 툴을 활용하여 aaa, aab, aba 와 같은 새로운 정렬과 배치를 더해나간다. 이렇게 전혀 다른 이미지가 생겨나고, 다른 시공간이 열린다. 완성된 이미지의 시작과 끝은 작가만이 알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 새롭게 소개되는 <이미지 컴포넌트image component>에서는 기존의 방식에서 조금 변화된 양상을 보여준다. 그 전 시리즈에서 보여준 작업들은 먼저 손으로 시작한 그림을 컴퓨터 파일로 전환하고, 요소(컴포넌트)들을 추출하여, 프로그램의 정렬과 리캐스팅recasting 방식으로 무한 증식과 소멸하는 규칙을 고수했다면, 이번 시리즈에서는 이와 반대로, 언뜻 컴퓨터의 툴을 따라하는 것 같은 손작업이 대부분의 구성을 아우른다. 이 작업의 출발은 출판을 염두하고 서로 쌍을 이루는 ‘짝수의 이미지’를 그린 연작이었다고 한다. 나머지가 없이 떨어지는 수의 규칙, ‘짝수’로 맞춰진 두 개의 이미지는 짝이 되어 서로가 서로를 완성한다. 수의 세계에서 짝수는 나누어 남는 것이 없고, 대칭, 균형, 조화의 아름다움이 있다. 반면, 짝수는 어떤 수로 나누어도 온전할 수 없는 홀수가 표현하는 미지의 세계, 변화와 변천의 가능성을 배제한다. 이미지와 이미지가 짝을 이루기는 하지만, 이미지 안에서의 점, 선, 면과 같은 조형의 기본적인 요소들과 손에 꼽는 색의 사용은 정작 수열로는 정리될 수 없는 감각의 표현이다.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이 엄격한 규칙의 세계는 자연스럽게 허물어졌고, 결국 짝의 강박에서 벗어나 홀수로 떨어지는 이미지가 파생했다, 마치 미지의 세계로 한 발짝 더 나아가는 짝수가 된 것처럼 작가는 자연스럽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보인다. 화면 속 요소들이 보여주는 움직임은 여전히 조심스럽지만 조금 더 과감하게 쪼개지고, 합해지고, 부유하고, 파생해나간다. 기하학적인 요소의 사용이 추가되었고, 요소들 간의 긴장감이 두드러지며, 이 긴장감으로 이루어지는 나름의 배치가 전체의 조화를 구축한다.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는 19세기 말 유럽에서 회화가 음악처럼 어떤 양식이나 문법을 통해 전체를 통제하고 균형과 조화를 구축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가 화면에서 제시하는 기하학적이고 추상적인 요소들은 각각 관념적인 세계로 연결하는 의미를 가진 상징으로 작동했고, 그렇게 새로운 회화 언어를 만들어냈다. 급진적인 산업화의 풍경 안에서 당대 유럽의 지식인들은 ‘예술의 목적성’을 찾고자 했고, 회화라는 매체 안에서 모방적인 재현을 넘어서는 방식, 즉 정신적 실재 세계에 대한 탐구는 자연스러운 귀결일지 모른다. 그리고 2017년 서울, ‘가난한 이미지’가 범람하는 일상의 인터넷 세계와 컴퓨터 툴의 감각이 우리 인식의 면면이 스며있는 지금을 살아가는 박현정은 시대와의 관계성을 규칙으로 표현한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의 화면 속 점, 선, 면, 색이 비물질적 정신세계와의 물질적인 교감을 시도한다고 이야기하면 어떨까? 다만, 박현정의 시대에는 예술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순진한 기대나 목적성은 애초에 믿지 않고, 오히려 ‘자기만족’의 유연함이 거꾸로 세상을 응시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일상에서 박현정은 인터넷에서 무한정 생산되고 소비되는 불특정 다수의 이미지들을 채집하여 자신만의 블로그에 모아두는데, 이 이미지들을 살펴보면 특정 주제를 중심으로 독해나 분류가 불가능한, 절대 개인의 취향에 대한 인상만을 제공한다. 예를 들면, 무서울 정도로 선명하게 찍힌 사막이나 화산과 같은 지구 자연의 깊은 속결이나 컴퓨터가 만들어낸 인공의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구성하는 X, Y, Z와 같은 임의의 점과 선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그림 등이다. 내셔널 지오그래피와 같은 매체에서나 볼 수 있을법한, 일상과 동떨어진 자연의 이미지들을 보면, 분명 존재하지만 정확히는 알 수 없는 대자연의 강력한 생명력을 상상해보지만, 동시에 서울의 일상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미끄러지는 어떤 비현실에 대한 반생명력이 또렷하게 존재한다. 이 세계에 임의로 접속하고, 부분을 채집하여 자신만의 블로그에 클릭, 저장하는 그녀의 뇌 혹은 손은 아주 선명한 가짜를 채취하며 어떤 쾌감을 찾는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온라인에서의 취미 활동은 자연스럽게 새로운 이미지 생산으로 연결된다. 이 미술은 미술사의 기록과는 무관하게 태어났고, ‘우리’라고 묶을 수 있는 공통의 기억에 대한 자취도 없다. 철저하게 개인적인 미감에 의해 선택되고 완성되는 이미지의 연작은 현실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속박에서는 자유롭지만, 작가 본인이 선택한 규칙 안에 자발적으로 갇혀있다. 그리고 이러한 순수한 형식 실험은 분출하기 보다는 분절하고, 표현하기보다는 절제하고, 생명보다는 죽음이며, 욕구의 해소보다는 금욕적이고, 선형적이기 보다는 시간의 차원을 허문다.

  그런데 미술을 둘러싸고 있는 무수한 조건, 그러니까 현실의 권력 구조 안에서 이 미술이 어떠한 의미를 획득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보면, 그의 미술은 대척하는 지점이 있다. 하나의 언어, 혹은 커뮤니케이션의 개체로서 미술이 전시라는 형식을 통해서 소개되고, 미술품이라는 물질로서 판매되고 유통되는 여전히 고전적이고 ‘속물적’인, 그리고 사회 전반의 문제와 얽힌 기존의 체계와 (아직은) 긴밀하게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의미 없음’으로 둔갑한 시각적 결과물과 사회가 맺는 관계에 대하여 발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것은 실질적으로 작동하지 못하는 ‘미술’ 혹은 ‘미술계’의 무능에 대한 이전의 시간과의 단절을 선언하고 ‘오늘의 미술’이라고 선언하는 제스처와는 다르다. 그렇기에 이 미술은 윤원화가 이야기하는 한 도시의 자기표현적인 주체로서 미술이었다가 어느새 순수한 자유로운 개체로 확장해가는 ‘서울의 미술’에서는 사뭇 한 걸음 뒤로 빠져있다. (『1002번째 밤: 2010년대 서울의 미술들』, 윤원화, 워크룸프레스, 2016)

  그러나 박현정의 작품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작가가 컴퓨터 환경과 자각의 프로세스 작용을 밑에 깔면서도 작품을 어디까지나 시각적 대상으로 문제 삼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작품들과 작품의 구성 요소들 모두가 다 같이 이 명징성이라는 하나의 독특한 질서의 세계를 향한 발현이다. 그러면서도 이 질서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무궁한 시각적 변화를 자체적으로 탑재한 유기적인 질서다. 그리고 그 변화의 가능성 자체가 비단 박현정 작품의 가능성뿐만 아니라 회화 전체의 가능성을 조용히 질문한다. 어디까지가 그림이고 어디서부터 회화가 될 수 있을까? 박현정의 화면 안에서 깨끗하게 정돈된 점, 선, 면, 색, 원, 사각형과 같은 조형 요소가 갖는 독특한 운동성, 그리고 디지털 툴과의 협업을 통해 직조된 새로운 2D 언어가 새로운 회화 언어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은 아닌가? 지금까지의 회화사를 평면위의 물질성을 근거로 창출되는 일루젼 혹은 감각의 변주라고 이야기 한다면, 기존의 경계를 분열하고 확장하고 일면 압축한 그의 평면 이미지는 회화라는 매체에 역으로 회화가 아닌 조건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은 아닐까? 박현정의 이미지는 회화에서 물질과 비물질의 경계, 내적 상상력과 외적 필연성으로부터 해방을 촉구하는 조용한 요청처럼 들린다.

_권진

전시 디자인 : 신신

촬영 : 홍철기

박현정 개인전

이미지 컴포넌트

2017.6.16 -

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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