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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게 떠오르는, 미끄러지며 나아가는

  검푸른 숲의 머리 꼭대기 위로 UFO가 떠오른다. 검은 개가 검은 물의 건너편을 바라본다. 공터를 둘러싼 키 큰 나무들이 어수선하게 부딪힌다. (〈그림자 전투〉) 그리고 일그러지며 타오르는 불길과 이를 넋을 잃은 표정으로 바라보는 두 아이가 있다. 텅 빈 눈동자에는 삼 킬 듯 타오르는 불길이 생생하다. (〈꺼지지 않는 불〉) 박신영과 송승은의 작업은 각각 풍 경화와 인물화로 구분할 수 있지만, 현실 세계와는 동떨어진 느낌을 준다. 두 작가 모두 직 접 관찰한 풍경과 경험한 사건에서 영감을 받지만, 실제 마주했던 장면을 재현하지 않고, 상 상으로 엮어내기 때문이다.

  박신영의 〈블루의 영역〉에는 키 큰 나무에 둘러싸인 붉은 건물이 그려져 있다. 구령대와 담장이 함께 그려져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학교로 보인다. 그러나 학생은 그림자조차 보 이지 않고, 창살처럼 보이는 정문은 굳게 닫혀 있다. 담장 주변에 솟아난 나무들이 웅성거리 듯 주변을 감싸고 있어 학교는 마치 숲에 갇힌 미지의 영역처럼 보인다. 〈호텔 선플라워〉 의 커다란 꽃이 그려진 파란 건물은 그 자체만으로도 어쩐지 스산하게 보인다. 호텔에는 불 빛 하나 켜져 있지 않고, 거리에서도 인물의 존재를 느낄 수 없다.

  박신영이 그린 풍경에는 애초에 인물이 그려져 있지 않거나, 등장한다 하더라도 주변 풍경 과 뒤섞여 지워져가거나 존재감이 드러나지 않는다. 간혹 등장하는 자동차는 인물의 존재를 암시하기보다는 긴장감을 조성하는 장치처럼 보일 뿐이다. 대신 그의 풍경에 자주 등장하는 키가 큰 나무, 숲, 수풀은 윤곽이 흐트러져 마치 한 덩어리처럼 뒤엉켜 있다. 여기에 붉고 파란 건물, 엉뚱하게 등장하는 UFO, 사건을 암시하듯 어둠을 가르고 등장하는 자동차까지 이질적인 요소들이 조합되어 있어, 실제 풍경이나 특정한 장소는 아니라고 느껴진다.

  반면, 송승은의 작업에는 주로 인물이 등장한다. 구체적인 묘사 없이 미끄러지듯 그려진 얼 굴은 그저 덩어리처럼 보이기도 하고, 어떤 얼굴은 반 쯤 지워져있기도 하지만, ‘얼굴’이라고 인식할 수 있는 건 그 위로 떠오르는 표정 때문이다.〈복잡하고 조용한 대화〉에는 한 가족 으로 보이는 인물들이(반려 동물까지) 함께 모여 있지만, 모두 무언가에 놀란 듯 멍한 표정 으로 정면만 응시한다. 한 명만 그려진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모두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지 만 무엇도 보고 있지 않은 듯 눈동자에는 초점도 생기도 없어 보인다. 그들의 텅 빈 눈동자 는 캔버스에는 그려지지 않은 어느 지점만을 향한다.

  게다가 이들은 서로를 바라보지 않는다. 시선을 주고받지 않으니 그들의 관계를 유추하기 힘들며, 그 안에서 이야기를 만들어내기는 더더욱 힘들어진다. 등장인물들의 표정은 많은 것 을 이야기하면서도, 무엇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구체적인 언어나 직접적인 상황이 제시되지 않고, 특정한 주제나 고정된 주인공이랄 것도 없다. 그들의 텅 빈 표정은 희로애락이라는 구 분도, 기승전결이라는 구조도 따르지 않는다. 그저 놀라움, 충격, 당황과 같은 정황만이 제시 된다.

  그래서 박신영의 풍경과 송승은의 인물은 텅 비어 있다. 이는 단지 인물이 존재하지 않는 다는 점이나, 인물의 눈동자에 초점이 없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다. 박신영이 만든 세 계는 작가가 직접 관찰한 현실 세계를 기반으로 만들어지지만,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기호는 지워내고 상상을 더해 만들어낸 존재한 적 없는 풍경이다. 송승은의 작업에는 구체적인 단 서가 드러나지 않아 관객은 등장인물들의 시선 너머를 그저 상상해야만 한다. 하지만 텅 빈 표정 아래에는 어떤 정답이나 기승전결이 숨겨져 있지 않기에, 관객과 작품은 끊임없이 만 나면서도 계속해서 빗나가게 된다. 이처럼 박신영과 송승은이 그려낸 세계는 현실 감각이 지워진 채로 붕 떠있거나, 상상해야만 하는 여지로 남는다.

  두 작가는 ‘그리기’를 통해 현실 세계의 단단한 구조와 질서를 지워낸다. 언어로 규정할 수 있거나 고착된 의미를 쫓기보다는, 캔버스 위에서 미끄러지고 뒤엉키며 의미망 사이를 빠져 나가고자 한다. 그렇게 그려진 세계는 현실 세계의 단단한 질감과는 다른, 울렁거리고 일렁 이는 질감으로 이루어진다. 박신영의 작업에서 꾸준히 등장하는 그림자가 뒤섞인 숲의 형상 이나 빠른 속도로 미끄러지듯 그려내는 송승은의 작업 방식은 그런 상상의 세계를 구체화 시킨다. 박신영과 송승은에게 ‘그리기’는 자신과 세계를 연결하는 방법이며,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내는 놀이이자, 현실 세계의 이면을 엿보는 탐색인 셈이다. 그리고 관객에게는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만남이다. 상상은 캔버스 위에서 그림자처럼 스며들며, 꺼지지 않는 불길처럼 새어나온다. 두 작가는 자신들이 만들어낸 일렁거리고 울렁이는 세계에서 미끄러지고 빗나 가면서도 각자의 나아가는 방법을 찾아 가고 있다.

_서다솜(합정지구 큐레이터)

주관 : 합정지구

촬영 : 홍철기

디자인 : 이아람

후원 : 서울문화재단

공백이 가득한 행성

기획 : 서다솜

참여작가 : 박신영, 송승은

2018.2.2 -

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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