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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아라1

 

 

 

영웅과 혁명의 신화가 욕망으로 부활한 시대2에 살고 있는 김실비는 자신의 비디오 작품에서 여전히 신화의 작동 방식을 소급하는 중이다. 신화의 작동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김실비가 주로 취하는 방식은 “원형적인 상상력archetypal imaginations"으로, 이 범주에서 고려될 수 있는 신성존재에 대한, 타자에 대한, 공간에 대한, 시간에 대한, 세계 법칙에 대한 다섯 가지의 상상력을 충족한다.3 <엇갈린 신(들)>(2015)에서는 아시아, 독일, 멕시코 문화와 역사 사이 어딘가에 존재하는 상상의 신성존재들이 전시장에서 다양한 매체로 재현되었고, <계시의 나날과 자매>(2016)에서는 기존의 사회 체제에서 탈락한 타자들에 대한/의한 상상의 몸짓과 이질적인 드라마가 있었다. 그동안 김실비가 보여준 미술 설치들은 한결같이 전시하는 ‘공간'을 작품과 유동적으로 구조화하는 특유의 운동성을 전제로 하며, 작품 속에서 나타나는 공간 역시 현실 공간과 대칭적으로 형성된 낯선 공간들이었다. 동시에 김실비가 보여주는 다채널 영상, 텍스트, 사운드, 이미지는 전시장이라는 공간과 맞물려 운동하며 반복적이면서도 무한대로 확장하는 구조로 향해 반복 재생looping하는 방식을 채택한다. 이 방식은 언제 누군가가 접근하더라도 새로운 환경이 구축되는 (불)가능한 시간을 상상하기 위한 구조다. <작고 따뜻한 죽음>(2016), <회한의 동산>(2018), <목석과 당나귀들>(2014)에서는 ‘삶과 죽음', ‘천국과 지옥', ‘생산과 소비', ‘여기와 저기' ‘금기와 자유' ‘어제와 오늘', ‘낮과 밤', ‘욕망과 억압', ‘가짜와 진짜', ‘무지와 지식' 등 세계를 구성하는 존재와 존재자들이 양항으로 설정되어 대칭 구조를 형성하며, 이 대응체들이 의미작용으로 해석되고 결합되고 다시 분해된다. 다만 이러한 다섯 범주의 상상력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교차하며 전체 서사를 전개하는 방식은 전형적인 신화의 구조를 배신하는데, 쉽게 말해 김실비의 작품은 스토리텔링을 목적하지 않는다. 김실비 작품에서의 서사는 앞을 봐야 뒤가 이해되는 인과관계가 분명한 기승전결의 구조가 아닌, 파편적으로 채집되거나 창작된 텍스트, 푸티지, 사운드, 이미지가 상호 침투적으로 작동하고, 이 전체의 구조 자체가 무한히 반복 재생하면서 우리의 인식 체계를 서서히 점령해간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구조화된 김실비의 작품을 일종의 데이터베이스의 재현4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정보를 집적하고 문화를 재현하며 우리에게 끊임없는 ‘접속’을 제안하는 김실비의 작품에 태그되는 한결같은 해시 태그#는 바로 이 질문일지 모르겠다. “이 시대5를 살아가는 당신에게 미술은 무엇입니까?”  

 

             2018년 합정지구에서 소개하는 <회한의 소굴>은 제7회 신도작가지원프로그램 선정 작가로서 소개했던 개인전 <회한의 동산>(2018)과 광주 네이버 파트너스퀘어에서 열리는 전시에서6 소개할 <회한의 사당>(2018)과 연결해서 감상할 수 있다. 전시의 제목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회한悔恨’이라는 단어는 ‘뉘우치고 한탄하다'는 뜻을 가진 한자어이고, 현재 잘못되어 있는 것을 알고, 사실 그것이 잘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반성과 후회가 담긴 불편한 감정의 상태를 의미하며, 종교적 의례에서는 잘못을 뉘우치고 마음을 바로잡는 회개로 나아가기 전 단계로 설정된다. 신도리코 본사의 사무실 사이에 마련된 복도 공간에서 소개한 <회한의 동산>을 구성하는 요소들, 즉 둥글게 둘러싼 반사경의 나열(<파고다>, 2018), 성경에서 회한의 인류를 상징하는 뱀(<역광 순례길>, 2018), 고도화된 미래 어딘가 에서도 반복되는 시간을 카운트하는 듯한 비디오(<회한의 동산>, 2018), 이 모든 요소가 허구의 ‘탑돌이'를 유도하는 듯한 공간의 구성 등은 우리가 무엇을 향해 회한할 것인지를 묻는 듯 하고, 이 질문의 중심에 ‘미술'이 있다. 이 전시에서 김실비는 미술이라는 특수한 예술의 장르가 언뜻 별개로 위치하는 듯 보이면서 동시에 적극적으로 개입되거나 더 슬프게는 종속될 수밖에 없는 현실, 즉 패권적 시장경제의 질서와 기술발전의 정치성으로 간략하게 묘사될 수 있는, 그렇지만 종국에는 ‘현존과 죽음'으로 귀결되는 여전한 삶의 보편성을 그렸다. 만약 이 ‘동산'을 작가가 상상하는 대서사의 1부라고 상정한다면, 이 서사의 2부 혹은 3부에 자리 잡은 합정지구에서의 <회한의 소굴>은 ‘동산'의 상태와 반대항으로 대립하는 혹은 격하된 하나의 조직이다. 성경에서 ‘동산 밖’은 하나님과의 결별을 상징하고, 이 소굴은 어떤 초월적인 존재 혹은 신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은폐하는 이단의 공간으로 낙점된다. 따라서 ‘소굴'에서의 김실비는 미술의 자율성을 찾기 위한 우회의 전략을 펼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미술을 크게 세 가지 종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면, 특정 결과물이 미술 작품으로 물화되었던 미술의 전통과, 활동이나 수행으로 드러나는 과정으로서의 현대 미술과, 미술에 점령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직업으로서의 미술7 모두가 이 소굴로 소급된다. 

 

             <회한의 소굴>에서 김실비는 합정지구의 지상층과 지하층을 연결하는 하나의 맥락을 구성하기 위한 영상, 벽화, 이미지, 사운드, 조각 등 다양한 미디어 매체의 신작들을 소개한다. 지상 전시장 윈도우에 설치되는 <실재계 길목의 제단>은 정성과 절실한 마음을 상징하는 촛불, 두 손, 달, 물을 담은 그릇과 이성과 모더니티를 상징하는 줄자가 대비되는 영상이다. 이 작업을 시작으로, 일종의 로고나 문양처럼 읽히는 반복되는 무늬로 채운 벽화위에 흘러가는 <공염불>이 지상 전시장을 채우고, 공통의 각본을 사운드로 입힌 지하층의 다른 영상 <빈 무덤>과 함께 하나의 생각을 각각 활자와 목소리라는 다른 커뮤니케이션 매체로 확장시킨다. 3D 프린트 조각으로 재현된 <고인돌 1, 2, 3>, 산자와 죽은 자가 미니어처 형상으로 교차하는 어느 바위 아래의 제단을 깃발 천에 프린트한 <비좁은 마음의 추억>은 ‘소굴'의 구조를 작동시키는 개별적 요소들로 전시장에서 따로 또 함께 존재한다. 그리고 이렇게 구성된 전체의 구조는 전시를 주최하는 합정지구라는 서울의 한 신생공간이 도모하는 작은 미술 공동체와 어떤 미술사의 맥락으로 접속한다. 서울은 분단된 남한에서 빠르게 발전했고, 여전히 성장하며, 폐허, 재생, 예술과 보존이 동시에 발생하고 사라지는 복잡하고 어지러운 도시다. 서울에서 현대미술을 하는 이들은 지역만이 기억하는 근대화와 압축적인 계급 문화를 체화하고, 지금은 주류가 된 90-00년대 대안공간 세대와 어긋난 ‘동시대'를 살아가며, 여전히 정부 후원의 공공 기관과 공보 기관의 경계 사이 어딘가에 자리 잡은 모호한 정체성으로 점철된 제도의 그림자 속에서, 2010년을 기점으로 가시화가 된 제도와 괴리되고, 심지어 제도와 교차하더라도 아무런 상호작용이 일어나지 않는8 새로운 세대의 미술인들과 함께, 모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장 안에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입증하기 위해 각자의 방식으로 고군분투중이다. 김실비는 물리적으로 베를린을 기점으로 한 유럽의 미술 생산 환경에서 최전선의 지식과 감각을 흡수하지만 동시에 항상 서울의 풍경 속에 들어와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일견 밋밋하고 심심한 양태로, 동시에 다소 솔직하고 불온한 태도로 새로운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한다. 해시 태그는 여전하다. 이 시대9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미술은 무엇이 될 수 있을까?   

 

             ‘미디어 아트’라는 카테고리에 분류되는 많은 현대 미술가들처럼 김실비 역시 최신의 기술을 기반으로 계속해서 업데이트되는 미디어 환경에 주목하고, 이것을 적극 활용한 작품의 형식은 물론, 이러한 환경에서 변해가는 우리의 상태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하지만 이런 특성을 가진 작가들을 대게 넓게 아우르는 분류, 즉 미디어 매체를 기반으로 창작하는 너른 반경 내에 분포된 ‘미디어 작가’에 비하여 김실비는 더욱 ‘미디어’ 자체에 집중한다고 볼 수 있다. 이 ‘미디어’는 단순히 기술의 변화를 팔로업하고, 최신의 기술을 작품에 빠르게 대입하는 식의 접근방식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김실비는 계속해서 변해가는 미디어 환경에 조응하는 우리의 감각 체계에 조금 더 좁고 깊이 속해 있다. 그리고 이 미디어 환경을 제대로 인지하기 위해서는, 지역별로 다르게 조직되어 온 정치 문화적 현실을 읽어내고, 그 다른 현실의 시공간을 전 지구적으로 ‘객관화 시키는’ 자본적 전환에 대입하여, 김실비 월드에서 생성하는 ‘코드’, ‘데이터’, ‘표상’과 ‘알레고리’가 연출하는 유동적인 운동성이 미디어로 작동한다는 뜻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김실비에게 ‘미디어’는 자신의 직업적 삶을 그대로 투영하는 소박한 저항, 노동, 그리고 사유의 실험장이다. 작가의 일상이 자리 잡은 베를린, 직업적 활동의 반을 공유하는 서울, 그리고 레지던시를 위해 방문하는 런던, 프라하 등 다른 도시에서의 경험과 이 경험을 토대로 김실비 영상과 설치에서 조직하는 이미지와 텍스트의 관계성, 그리고 이 모두가 엮어져서 김실비만의 ‘미디어적’ 구조가 성립된다. 서울 밖에서 활동하는 작가 김실비에게 유효한 미술의 목적은 영상 언어의 알레고리만큼이나 중요한 전시장이라는 공간이 형식 알레고리10로 전환되는 바로 그 장면에서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의 비디오에서 채집하고 나열하는 푸티지가, 이미지가, 짤방이, 기업적 미학이, 대중문화 코드가, 핸드폰 동영상이, 값싼 그래픽이, 최소의 연출이 가난하지만 당당한 시각적 가치를 찾고 있다. 믿음을 융통하고, 암호가 되어 순환하며, 스스로의 몸값에 투기하기를 독려하는11 김실비는 가난한 이미지로 점철된 미디어의 미학을 공회전 시켜 역설적으로 철저한 자본주의의 논리 안에서 미술을 하고, 그렇지만 그 미술이 삶을 역전하거나 착취하려고 할 때에는 작동하지 않는 아이러니에 대한 우리 삶의 실제를 투사한다. 복잡하고 다층적으로만 보이던 그의 알레고리는 공간이라는 교차점에서 우리의 시선과 가장 잘 만나게 된다. 결국 유동적이고 균열적인 이 구조는 서로서로 끌어당기면서 관람자의 발길을 이끌도록 처음부터 배려된 것이라는 것이다. 전시장에서 김실비의 화법이 완성되는 순간이다. 

 

             김실비가 2011년에 홍콩에서 먼저 발표한 <미술은 나에게 가난을 선택할 자유를 허락한다>는 구서울역사가 문화역 서울 284로 활용되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2012년 초겨울 A4규격의 박엽지에 제목의 문구를 포함한 여러 변형구를 인쇄해서 자연스럽게 배포한 퍼포먼스다. 미술가를 작업으로 선택한 미대 졸업생이자 신진 작가인 김실비는 ‘성찰적인 태도’12로 자신의 선택을 텍스트로 명시한다. 김실비는 스스로가 설명하는 것처럼13 ‘이론 전공자’로 출발한 창작인이라 무조건적인 창작의 에너지 보다는 자신의 삶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아주 지극히 현실적인 일상; 독일 타국에서 비자 갱신을 위해 분투하거나, 항상 부족한 작품제작비와 작가사례비의 경계에서 적절한 상호 의존적인 방법을 채택하거나, 전 지구적 뉴스를 빠르게 업데이트 하며 다多 시-공간에 최대한의 공감대를 일깨우는 방식으로 작업을 진행한다. 아티스트라는 아우라, 작품의 판타지, 예술의 초월성 따위를 믿지 않는 이 작가는 오로지 ‘일’ 혹은 ‘수행'으로서의 작업을 마주하고 이 과정에서 삶을 지탱하는 힘과 계기를 밀어 붙이기를 멈추지 않는다. 김실비에게 작가로서의 ‘노동’에 대한 가치 확인은 노동 자체에 대한 존재 증명14의 주제에 더 가까이 닿아 있다. 따라서 이 존재 증명이라는 대주제에 가까이 선 김실비의 노동/작업/직업은 그 경험과 사유의 과정을 전적으로 드러내는 그만의 서사 구축 방식과 미디어적 구조를 통해 ‘반복 수행’ 중이다. 그리고 이 수행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그의 미술은 아직까지 삶을 점령하지도 포섭하지도 않은 채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김실비의 공염불은 우리에게 미술에 섣불리 속지 말고, 미술을 낯설게 하고, 미술을 쫓아가고, 미술을 표현하고, 미술을 기억하고, 삶을 견디고, 미술과 함께 나아가라고 말한다. 미술을 직업으로 삼은 그대여, 삶을 당당하게 노동하라는 주문을 왼다.

​_권진

[1] 이 글의 제목은 신약성경 갈라디아서 5장 1절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에서 따왔다. 이 구절은 16세기의 종교 개혁가 마틴 루터가 가장 좋아했던 종교개혁의 출발이자 정신으로 알려져 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행위에 의한 구원이라는 중세의 신앙 양식에 반기를 들고 한 개인이 신과 내면적인 관계에 방점을 둔 신앙의 근원을 설파하며, 불합리한 종교적 구조에 대항하여 본질과 근원을 향한 ‘저항'이었다.

[2] “1977년에는 데이비드 보위가 ‘영웅들Heroes’이라는 곡을 발표한다. 그는 새로운 브랜드로 탄생한 영웅을 노래하는데, 신자유주의 혁명에 걸맞는 시점이었다. 영웅은 죽었다. 영웅 만세! 그러나 보위의 영웅은 더 이상 주체가 아니라 객체이다. 사물, 이미지, 반짝이는 물신이며, 스스로의 초라한 종말에서 부활하여 욕망으로 젖은 상품이다.”<스크린의 추방자들>, 히토 슈타이얼, 김실비 옮김, 서울: 워크룸프레스, 2017, 54쪽

[3] “한국 신화의 원형적 상상력의 구조: 신이神異에 대한 상상력의 범주와 신화의 사유체계", 한국학술진흥재단, 2006, 오세정. 논문에서 오세정이 다룬 한국의 신화 텍스트에서 보편적으로 드러나는 다섯개의 ‘원형적 상상력’ 병렬체를 반영해서 김실비의 구조를 살펴보았다.

[4] “레디메이드 알레고리”, 이한범, <비디오 포트레이트> 도록, 서울: 토탈미술관 프레스, 2017, 26쪽.

[5] 슈타이얼, 위의 글. 

[6] 전시 제목은 <헬로!아티스트 광주비엔날레 특별전 – 가공할 헛소리>이다. 

[7] “미술의 맥락에서 작업에서 직업으로의 이행은 부가적인 함의를 갖는다. 이 과정에서 미술 작품에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그 또한 직업으로 변신하는가? 부분적으로는 그러하다. 사물이나 결과물, 오로지 미술 작품으로서 물화되었던 것은 이제 활동이나 수행으로 드러나는 경향이 있다. 제한된 예산과 관심 범위가 허락하는 한 무한히 펼쳐진다. 오늘날 전통적인 미술 작품은 과정으로서 미술, 직업으로서 미술로 광범위하게 대체되었다”, 슈타이얼, 위의 책, 139쪽.

[8] <1002번째 밤: 2010년대 서울의 미술들>, 윤원화, 서울: 워크룸 프레스, 2017, 163쪽.

[9] 슈타이얼, 위의 글.

[10] 이한범, 위의 글.

[11] 김실비, <공염불>, <빈 무덤>, 2018. 

[12] <미술은 나에게 가난을 선택할 자유를 허락한다>, 김실비 작가노트, 2012

[13] "Interview: Sylbee Kim," planccc.com, 2013 (KR)

[14] <Monthly Revew #1: 작가 김실비를 만나다>, www.thestream.kr, 2016 (KR)

 

작가소개

 

작가 김실비는 2005년 이래 베를린과 서울을 오가며 영상 설치 중심의 작업을 펼치고 있다. 김실비의 작품은 역사적 기록과 도상을 현실에 병치하고 이 과정에서 미래의 여러 가능성을 제안하는 시청각적 언어를 구축한다. 작가는 합성, 애니매이션 등 제작 기술에서 파생되는 디지털 이미지를 이용하여 우리에게 익숙한 영상 언어를 진동시킨다. 서울 신도미술공간(<회한의 동산>, 2018), 인사미술공간(<엇갈린 신(들)>, 2015)과 프라하의 네반 컨템포(<붉은 액과 나르키소스>, 2017)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서울시립미술관, 신 베를린 미술협회, 홍콩 아시아 아트 아카이브, 뉴욕 독일문화원, 철원 리얼 DMZ 프로젝트, SeMA 비엔날레 미디어시티서울 <네리리 키르르 하라라> 등의 그룹전에 참여했다.

 

 

목소리 : 탁영준
출연 : 니콜라스 펠처, 김실비
각본 영문 감수 : 앤디 세인트루이스 제작,

연출 : 김실비
글 : 권진
영어 번역 : 김실비
진행 : 서다솜
설치 도움 : 노승표
기록 촬영 : 홍철기, 김실비

그래픽 디자인 : 이수진

지원 : 런던 가스웍스

김실비 개인전

회한의 소굴

2018.8.24 -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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