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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어딘가에 방치된 컨테이너, 몇 번이나 그냥 지나쳤을 전단지가 붙은 벽, 무언가를 잔뜩 실은 수레, 용도를 알 수 없는 텐트, 단종된 자동차. 권혜경의 작품에 등장하는 사물은 대체로 그런 것들이다. 분명한 쓰임새가 있어서 만들어지고 사용되었지만 목적을 다한 뒤에는 쉽게 잊히고 버려질 도시의 부유물이다. 작가는 쉽게 해체되거나 버려질 수 있는 ‘흔한 사물’로부터 오랜 타지 생활에서 이방인일 수 밖에 없던 자신의 삶과 모습을 발견했고 곧 사라지거나 잊혀질 그들의 모습을 빠른 필치로 캔버스에 옮겨냈다.

 

최근에는 작가의 작업실 주변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나무 팔레트, 비누 포장 상자, 모서리 보호대, 심지어는 어떤 낙서가 그려진 벽의 한 부분까지 작품이 되었다. 작가는 이 사물들을 평면 위에 그려낼 뿐 아니라, 사물의 외형과 유사하게 변형시킨 캔버스를 활용하여 ‘실현’해 낸다. 실제와 같은 모양, 두께, 질감을 가지고 재현되는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사물’들은 전시장 이곳 저곳에 배치(또는 방치)된다. 캔버스는 전시장 벽에 걸려야만 하는 평면이 아니라, 조립이 가능한 하나의 “유닛”으로서 다양한 가능성을 품고 전시장 내에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권혜경이 취하는 방법은 공간 내에서 회화가 존재할 수 있는 여러 가능성과 회화의 동시대적 위치에 대한 고민이 담겨있다.

 

그러나 권혜경의 형식 실험은 방법론적 계기에서 촉발되는 것만은 아니다. 작가가 세계를 인식하고 탐색하는 방법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 빠른 필치로 대상을 포착하여 사물이 본래 지니는 부피감에 비해 턱 없이 희박한 사물의 속성을 가시화하고 작가를 투영하던 전작의 방법에서는 사물과 작가의 관계가 두드러졌다. 그러나 ‘사물’ 자체를 만들고 전시장에 위치시키면서, 사물이 존재하는 공간과 시간, 그곳에서 발생하는 사건과 맥락이 작품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 즉, 사물(내)가 놓인 이 장소와 시간, 그 곁에선 또 다른 무엇과 사물(나)와의 관계가 전시되는 셈이다. 이런 변화에는 작가가 유학을 끝내고 작가로서 한국에 정착하는 과정에서의 경험이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작가 는 지금의 정착 과정을 “과도기”라고 표현하는데, 그것은 아마 자신 주변의 개체 또는 사건과 연루된 ‘자기 자신’의 위치를 안팎으로 살펴보는 과정일 것이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선보이는 그의 세 번째 개인전은 작가로서의 탐색과 모색을 더욱 본격적으로 전개한다. 

 

합정지구에서 개최하는 권혜경의 세 번째 개인전 《SALE》에서는 작가의 방법적 탐구가 이어지는 한편, 사물을 통해 자신의 주변과 그에 대한 작가의 견해를 풀어낸다. 전시 제목이 함축하듯, 전시는 오늘날 사회에서는 가장 일상적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사고 파는 일’에 대해 이야기한다. 합정지구의 1층 갤러리는 마치 작품을 팔기 위한 쇼룸처럼, 지하 갤러리는 상품을 보관하는 물품 창고처럼 꾸며진다. 그리고 그 안에는 방호벽, 도로 안전봉, U-볼라드(충격 흡수용 구조물)처럼 도로에서 일상적으로 볼 수 있는 사물이 들어선다. 눈에 잘 띄는 색으로 채색되어 도시의 방향을 제시하고 안전을 지키기 위해 도로 위에 굳게 고정되어 있어야 할 사물들이 통 유리로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쇼윈도 안에 자리한다.

 

방호벽이나 안전봉 따위는 일반적으로 본래의 역할을 다할 수 없다면 용도 폐기되는 일이 잦다. 그러니 이 사물들은 전시장에 들어서면서부터 상품 가치를 상실한 것이다. 무언가를 팔기 위한 ‘쇼룸’에는 적합하지 않은 대상이다. 쇼윈도 앞을 지나치는 어떤 이들은 어울리지 않은 공간에 자리한 사물의 기능과 효용성에 대해서 의문을 품을 수도 있겠다. 아니면, ‘전시장’을 방문한 관람객들에게는 기능을 발휘해야 하는 사물이 아닌 ‘작품’이라는 새로운 가치판단 기준의 대상이 될 것이다. 작가는 전시장이라는 특수한 공간에 소속되면서 본래의 기능을 상실한 사물을 어떻게 바라볼지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그 질문은 작품을 상품 가치로만 판단하는 작금의 미술 시장에서도 유효하다.

 

작가는 전시를 통해 “예술을 상품 가치로 판단하고 거래하며 유통할 수 있을까?”라는 ‘예술’의 가치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미술 시장 내에서는 작품을 ‘상품성’이라는 가치로 판단하고 값어치가 매겨지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구조에서 작가의 창작 열망이나 실험적인 시도는 현실적인 생존과는 동 떨어진 ‘도전’으로 여겨질 수 밖에 없다. 권혜경은 이런 현실에 질문을 던지기 위해 ‘쇼룸’이라는 공간을 상정하고 사물을 재배치한다. 전시는 질문을 던지는 작가와 전시 공간 내에서 자리잡은 ‘상품성’을 잃은 사물들, 그리고 이들을 바라보는 관람객 사이의 관계를 통해 비로소 완성된다.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물에 관심을 두고 그 사물을 통해 발화하는 작가의 방식은 이런 상호작용을 적극적으로 유도하고 전시장 내로 끌어들인다.

이전까지 권혜경의 작업에서는 작가가 사물을 거울처럼 마주보고 자신을 비추어보았다면, 이제는 사물의 안에서, 밖에서, 또는 그 너머에서 사물을 둘러싼 세계를 더듬어간다. 그 과정에서 ‘사물’은 여전히 작가의 거울이 되지만, 때로는 언어가 되고 작가의 경험을 압축하여 제시하는 매개체로 거듭난다. 그리고 작가는 전시장에 이들을 배치(또는 방치)하며 관람객과 만나고 다양한 의문을, 경험을, 상상을 촉발시킨다. 그런 의미에서 권혜경이 취하는 형식 실험은 단순히 회화라는 매체에 대한 질문을 뛰어넘어서 작가가 스스로를 던져 세계와 마주하는 방법적 탐색과 다름없다. 무수한 관계와 사건으로 쌓아 올려진 지금의 구조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점 찍고 다음으로 이어나가는 과정에 있는 것이다.


 

_서다솜 (합정지구 큐레이터)

주관 : 합정지구

후원 : 서울문화재단

권혜경 개인전 

Sales

​기획 : 권혜경

2019.7.27 -

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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