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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록시 常綠時》 : ‘늘 푸름’의 역설 

 

여기 주황이 촬영한 아홉 점의 인물사진이 있다. 2008년에서 2010년 사이에 촬영된 이 사진들은 ‘상록시(常綠時)’라는 전시 제목 아래, 한 점의 영상 작품과 함께 2016년의 이곳 합정지구에 불리어 세워졌다.

전시를 꼼꼼히 훑어본 이후에 글을 읽는 사람은 이들 전시작이 하나의 연작이며, 전시명 외에 ‘공원에서’라는 연작명이 붙어있다는 것을 간파했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를 이미 확인했을지도 모른다. 타인(他人)에 대한 주황의 관심이 6~8년의 시차가 만들어 낸 두 제목을 가로지른다는 사실을 말이다.

사실 주황이 관심 갖기 이전에도 사진이라는 매체 자체가 이미 타인을 지시하고 있었다. 모든 사진 속의 인물이 보는 이에게 타인이라는 것을 굳이 말할 필요가 있을까? 심지어 이른바 ‘셀카’ 속 인물조차 그러하다. 그들은 타인화한 자신이다. 무엇보다 사진은 언제나 촬영된 순간을 과거로 만들어버린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것이 나일지라도 사진을 바라보는 나와 사진 속의 나 사이에는 최소한 시간상의 괴리가 존재한다.

‘공원에서’ 연작을 처음 보았을 때, 나의 인상에 가장 먼저 남았던 것도 작품 속 인물이 과거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는 이들의 철지난 복장을 통해 드러났다. 이 무렵까지만 해도 20~30대 남자들 사이에서 <공원에서 6>이나 <공원에서 13> 속 인물이 입고 있는 나팔 모양의 바지를 입는 사람들이 있었다. 곧바로 모두가 스키니 진을 입는 바람에 이 바지들은 금세 폐기처분되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주황의 사진 속 인물은 이와 조금은 다른 의미에서도 타인이다. 이들은 작가의 의도 속에서 타인으로 설정되어 ‘공원에서’ 연작의 맥락 내에 놓였다. 주황은 이 연작을 위해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서울의 공원을 배회했으며, 그저 그곳에 있었기 때문에 이 인물들을 불러 세웠던 것이다. 작가인 주황과의 관계 속에서 이들은 카메라를 뒤로 하면 다시는 마주치지 못할 도시 속 익명의 개인이다.

그리하여 이 사진들에는 타인을 마주할 때의 낯설고 어색한 찰나가 새겨져 있다. 이는 촬영된 인물의 제스처를 통해 가장 잘 나타난다. ‘공원에서’ 시리즈의 인물들은 포즈를 취함으로써 낯선 이의 카메라 앞에 서는 두려움을 무마시킨다. 팔짱을 끼기도 하고 뒷짐을 지기도 한다. 동료의 어깨에 손을 올리기도 한다.

<공원에서 2>에 등장하는 중학생 쯤 되어 보이는 두 명의 사춘기 소녀에게는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심을 어느 정도 드러내는 것이 오히려 편하게 느껴지는 모양이다. 어리숙하여 성인의 눈에 어딘가 사랑스럽게 보이는 그 포즈를 묘사하자면, 이들은 마치 카메라 앞에 서서 자신의 뒤쪽에 있는 사진의 소실점 속으로 들어가 숨어버리려는 것처럼 보인다.

이처럼 주황의 ‘공원에서’ 연작은 익명의 타인을 마주하는 순간을 과장 없이 표현한다는 점에서 탁월한 사진이다. 그런데 최근 이 사진들에 대해 가지게 된 주황의 또 다른 관점이 아니었다면 이들이 전시장 내에서 한데 모일 일은 없었을 것이다. 주황은 “요즘 젊은 사람들이 너무 힘든 일을 겪고 있는 것 같아” 이 사진들을 전시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러고 보면 전시작 사진 속 인물들의 나이가 눈에 들어온다. 이들은 대략 열두어 살에서 서른 남짓에 이르는 청소년(靑小年)과 청년(靑年)이다. ‘상록시’라는 전시 제목에서 ‘상록(常綠)’이란 이들의 젊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나는 주황이 요즘 들어 연민을 느끼는 그 젊은 사람들의 ‘힘든 일’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따져 묻진 않았다. 그것이 무엇이었던지 간에 이른바 386세대로서 ‘젊은 사람’에 대한 연민을 책임으로 바꾸는 주황의 이러한 태도에는 응당 일종의 품위라 부를만한 어떤 것이 있다. 그것은 ‘아프니까 청춘이다’라고 타인의 고통에 관해 함부로 말하면서 엉뚱하게도 자신의 지난날을 연민하는 ‘꼰대’의 태도와 정확하게 반대되는 것이다.

그럼 ‘상록시’란 제목은 대체 무슨 뜻인가? 나는 약간은 맥락을 바꾸어서 이 제목에 대한 주석을 다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누군가는 이를 언제나 푸르고 활기 있는 연령의 사람들을 예찬(禮讚)하기 위한 말로 생각했겠지만, 나는 이 말을 조금 삐딱하게 읽어보고 싶다. 어떤 일군의 사람을 예찬한다는 것은 그들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과는 별로 관련이 없다. 달리 말해 상대에 대한 존중이나 이해 없이도 그들의 아름다움을 칭송하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가령 수많은 남자들이 오래도록 여성의 몸이 가진 아름다움을 입이 닳도록 찬미해왔지만, 삶에서 그 몸이 실제로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상록시’라는 말은 어딘가 역설적인 용어처럼 보이기도 한다. ‘상록’이란 말 그대로 ‘늘 푸름’인데, ‘늘’ 푸른 사태를 특정한 때를 의미하는 ‘시(時)’라는 말로써 한정하고 있으니 말이다. ‘늘 푸른 한 때’라는 말은 거꾸로 ‘오직 한 때에만 푸르다’는 뜻이 되기도 하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해석이 가능한 까닭은 ‘상록’이라는 말 자체가 오늘날 현실에서 역설적인 방식으로 통용된다는 데에 있다. 이 단어를 곧이곧대로 사용하는 곳은 어디일까? 그곳은 이 말의 뜻과는 반대로 많은 것이 가장 빨리 생기고 사라지는 곳이다. 내가 출퇴근하는 미술관의 맞은편에는 ‘에버그린관광호텔’이라는 숙박업소가 하나 있다. 이곳 여름의 녹음은 어느 때 보다 우거졌지만, 운영은 멈추고 있다.

농담 같은 사례이지만, 이는 우리가 정작 사태의 핵심은 놓아둔 채 ‘늘 푸름’이라는 껍데기만을 너무 많이 소비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해프닝 중 하나가 아닐까? ‘상록시’라는 말은 이런 상황을 지시한다. 가능하지도 않은 푸름을 강요받는 역설적인 시기나 시대 혹은 세대, 나에게는 그렇게 읽힌다.

그렇게 보면 역시 젊음의 푸름을 강조하는 청춘(靑春)이라는 단어도 언제나 속이 비어있기는 마찬가지다. 민태원의 유명한 수필 「청춘예찬」이 작가 자신의 청춘이 저물기 시작하는 시기였으며, 당시 지식인들이 스스로 퇴폐적인 시대라고 일컬었던 1920년대 말에 쓰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반대로 실제 청춘으로 불리는 나이의 사람들에게 그것은 부담스러운 이름이다. 20대의 산울림이 <청춘>에서 “언젠간 가겠지 푸르른 이 청춘 … 차라리 보내야지”라고 읊조리듯 말이다.

이러한 역설의 끝에는 슬프게도 죽음이 있다. 교복 입은 고교생의 푸르른 모습이 담긴 사진을 보았을 때 떠오르는 국민적 이미지는 무엇일까? 누군가는 눈물부터 주룩 흘릴지도 모를 일이다. 어떤 말과 이미지도 가닿지 못하는 그곳에 바로 ‘상록’이 있다. 전시작의 인물이 입은 노란색 복장이 유독 슬프게 느껴졌다면 그것은 오독이 아니며, 그 슬픔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_김시습(양주시립미술창작스튜디오 학예연구원)

디자인 : 안수인

인쇄 : 3p

코디네이터 : 조민주

2016.7.1 -

7.24

주황 개인전

상록시 常綠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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